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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가 녹인 세상

doggya 2010. 3. 27. 10:49

 

 

운동화가 녹인 세상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 한 청년이 어느 산 밑 외딴집으로

들어섰다. 한 노인이 그 청년을 따뜻하게 맞이했는데, 청년은

그 노인에게 단 하나뿐인 피붙이였다. 몇 달 전에 집을 나가 방

황하다가 불쑥 나타났지만 노인은 그동안의 행적에 대해 아무

것도 캐묻지 않았다. 돌아온 아들이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노인의 눈에 아들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며칠 동안 하루 세

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 게 분명했다. 집까지 걸어왔기 때문

인지 하얀 운동화에는 흙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노인이 빙그래 웃으며 먼저 말했다.

 

 "잘 왔다. 배고프지?"

 

 " ··············."

 

 "방에 들어가 있어라. 금방 밥상을 차려주마."

 

 청년은 대신 밥을 짓겠다고 나서지도 못하고 부엌 앞에서

머뭇거렸다. 늙으신 아버지가 쌀을 씻고 밥솥에 손을 담그며

밥물을 확인할 때까지 청년은 부엌문에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줄기 바람이 부엌 안을 스쳐갔다.

 

 노인은 아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잊고 있었다는 듯 빙

그레 웃어주었다. 청년은 아버지의 미소가 부담스러웠는지 부

엌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이내 돌아섰다. 서산으로 하루의

흔적을 남기며 사라지는 노을이 장작불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

었다.

 

 노인이 서둘러 차린 밥상에는 밥이 두 그릇이었다. 하나는

방금 전에 새로 지은 밥이고, 다른 하나는 아침에 아들 몫으로

여유있게 준비했던 밥인데, 차갑게 식어 있었다. 노인은 아들

앞으로 따뜻한 밥을 밀어놓고, 자신은 된장국에 찬밥을 말아

먼저 먹기 시작했다. 청년은 입 천장이 다  헤어질 정도로 허겁

지겁 먹느라고 아버지의 저녁밥이 아침에 지어놓은 찬밥이라

는 사실도 생각지도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겨울밤이 찾아왔다. 청년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였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자 잠자리에서 일어

선 청년은 밖으로 나갔다. 부엌에서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거칠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년은 부엌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아버지가 흙먼지투성이

였던 운동화를 깨끗이 빨아 아궁이 불로 말리고 있었다. 운

동화에서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청년은 발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방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청년은 잠자리에서 겨우 일어

났다. 방 한쪽 구석에는 이미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그 옆에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봉투 안을 들여다보니 편지 한

장과 지폐 몇 장이 눈에 띄었다.

 편지에는 삐뚤삐뚤한 글씨체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평생을 몸 하나로 살아왔다. 너만은 험난한 이 세상을 머리

로 살아가길 원했는데·······. 다시 떠나고 싶을 때는 나를 꼭 한

번 보고 가라. 내가 지금 일하는 공사장은·······.

 

 

 청년은 아버지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말려놓은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몇 시간 후, 청년은 어느 공사장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등짐을 지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힘겹게 3층으로 올라가는 늙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

다. 어느새 청년은 눈물을 떨구며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며칠 후 노인에게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

 

 

 존경하는 아버님께!

 제가 이 험난한 세상을 머리로 살아가길 원하셨지만, 저는 비로

소 가슴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 아버님 곁으로

돌아갈 거예요. 운동화 속이 너무 따뜻해서 밤을 새워 걸어가겠

습니다.

 

 

출처 : 아침을 여는 행복 편지 (김승전 지음)

 

 

                    

        

              아버지 /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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