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4224

성탄을 일주일 앞둔 서울풍경

성탄을 일주일 앞둔 서울풍경 1 Dr. Gold 성탄을 일주일 앞둔 서울의 풍경은 한산한 명동거리를 비롯해서 쓸쓸하다. 코로나가 변이되면서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들어오고, 음식점도 다시 4인이내만 9시까지만 영업을 허용하면서 서민들의 시름이 깊어간다. 동대문 평화상가, 눈이 온 후 중랑천 봉화산 일대 풍경도 새해에 희망을 갖어보기에는 여유가 없다.

이중섭부부의 교류와 중섭 그림 내용

이중섭부부의 교류와 중섭그림내용 Dr. Gold 이중섭은 함경도가 고향이었다. 평북 정주 오산고를 졸업한후 1936년 일본에 미술공부를 하러 떠났다. 처음 제국미술학교( 현 무사시노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거기에서 고된 입학신고식에 질렸다. 1년도 되지 않아 그는 문화학원으로 적을 옮겼다. 이것은 그에게 '신의 한수"가 되었다. 설립자 니시무라 이사쿠라(1884~1953)는 원래 건축가로 미술, 문학, 음악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교육기관 창설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진보주의자로 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야마모도 마사코(현재 100세)를 만난 것도 이 학교에서였다. 마사코는 1938년 학교의 공용 세면대에서 붓을 씻으며 선배 이중섭을 대면하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중섭이 나중에..

도봉산행 전철에 코로나백신 희생자 천여명 각성 캠페인

도봉산행 전철에 코로나백신 희생자 천여명 각성 캠페인 Dr. Gold 지난 11월 7일 (日) 열시가 지나서 한 여인이 전철에 탑승하였다. 그녀는 머리에는 문재인이 간첩이고 삘갱이라고 써 붙이고, 몸통에는 코로나백신주사 희생자가 천 팔십명이라고 써 붙인 샌드위치맨 같은 차림으로 열차를 누볐다. 그는 도봉산역에 내렸다. 나머지 사진은 과거 도봉산매표소 근처의 단풍과 시냇가 풍경을 게재하였다.

서울 공예 박물관 전시품

옛 풍문여고 자리에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관람 Dr. Gold 안국동 오거리 북동쪽 옛 풍문여고가 있던 자리에 몇달전 서울공예박물관이 설립되었다. 북악산 아래 명당으로 세종대왕이 사랑하던 막내 아들에게 이 땅을 지명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여기를 안동 별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말에는 왕실 외척 민씨 소유였는데, 여기에 풍문여고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예약을 미리하고 지난 8월 18일 관철동 월평한정식집에서 동네 영어회화반 친구와 점심을 들었다. 박물관터에 들어서니 박물관 앞마당이 넓고 시원하였다. 세동이 배치된 전시관은 수십만점을 돌아보기에 다리가 아팠다. 자수수예품 등 민속품을 기증한 허동화, 박영숙 부부 등, 많은 분들이 수집품과 제작한 도자기 등을 기증하였다. 관람하기 며칠전에 예약..

종로 우미관 자리에 홍길동 중고 서점

종로 우미관자리에 홍길동 중고서점 Dr. Gold 지난 8월 5일 종로에 일을 보러 나갔다. 종로 2가 네거리 서남쪽 골목에 홍길동 중고서점이 생겨서 들어가 보았다. 정문옆 벽면에는 요즘 인기 없는 인물과 정당에 관한 낙서와 그림 같은 것이 크게 쓰여져 있었다. 안에는 2층까지 약 30만권 헌책들이 진열되었다. 칸마다 소파와 탁자 등도 있어서 쉬면서 책을 보거나 다과도 들수 있게 되어 있었다. 헌책 3권을 9천원에 샀다. 나오면서 보니 정문 북쪽에 우미관 옛터라는 오석이 보였다. 2020년에 서울시에서 세운 비문이었다. 우미관은 1912년이 일본인이 세운 한국 최초 영화관이었다고 한다. 처음 이름은 고등연예관이었고 1915년에 우미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벽돌 2층 건물안에는 입석으로 다다미가 있었고 베..

인왕산 성곽길을 저녁에 넘었다

인왕산 성곽길을 저녁에 넘었다 Dr. Gold 지난달 4월 8일에 평창동 종로구 검사 센터에 갔다. 요새 운전면허를 갱신하려면 고령자는 그런 검사를 거쳐야 하였다. 일을 마치고 천진포자에가서 만두로 점심을 먹었다. 북악 하늘길 위쪽에 육교같이 길이 가로질러 있었다. 그 아랫쪽에 윤동주 문학관을 견학하였다. 내친김에 좀 늦었지만 인왕산을 사직단쪽으로 넘어 보았다. 산정 가까이 오르면서 부부소나무(연리지목?)도 보고 마을에서는 이미 낙화한 벚꽃나무도 보았다. 산 꼭대기는 바위로 되었다. 한강 하류쪽까지 아파트와 고층빌딩들이 들어서 있었다. 한달전 다친 왼발이 아직 시원치 못해서 계단길로 하산하는데 힘이 들었다. 젊은 사람들은 해가 진 연후에도 인왕산을 계속 오르고 있었다.. 성곽 아랫길에서는 포장도로를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