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은행나무를 보며 가을, 은행나무를 보며 / 김진학 초등학교 옆엔 은행나무가 줄지어 있다 다시는 지지 않을 것 같은 잎들이 어느 날 한 번에 떨어져가면 가지만 남아 바람을 맞을 것이다 참 모진 이별이다 밤이면 안으로 은행 알을 만드는지 그 더위에도 잎 하나 떨어지지 않고 꿋꿋하게도 버텼다 ..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20.02.04
봉식이 봉식이 / 김진학 쌀 자루를 메고 부엌으로 들어간 봉식이가 춘자에게 수작을 건다 춘자 배를 앞산만하게 만들었으니 어머니께 받은 일 년치 새경을 자랑하는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봉식이 어깨가 힘이 들어갔다 그럴만도 한 것이 작년여름 동대항 씨름대회에서 황소를 탔다 머리는 좀 거..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7.07.21
바람난 그해 여름의 기억스케치 바람난 그해 여름의 기억스케치 / 김진학 그날 엘리베이터를 탔다 매일 봐도 낯선 듯 침묵하는 사람들 (다음부턴 계단을 오르내려야지 마음먹으면서도 고장 날 때 외엔 꼭 타고 다닌다.) 바람 따라 볼을 스치는 들꽃들의 행진이다 그래서 난 땀을 뻘뻘 흘리는 꽃잎을 보며 강둑을 걷는다 (..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7.07.21
포구기행 / 김진학 포구기행 / 김진학 나는 오래된 파도소리를 들으며 어두워진 포구에 선다 게들은 사랑을 찾아 돌아다니고 그리운 것은 모두 아파야 기억되는 도시에 사나보다 토실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인 뽕짝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술집의 불이 꺼질 때 쯤 설렁설렁, 여자에게 수작을 ..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6.04.05
춘자 춘자 / 김진학 부엌 한 쪽에서 이밥 한 그릇 배불리먹은 춘자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우물가로 간다 나는 걸어가는 춘자 옆의 감나무만 바라 보았다 지랄 맞게도 열리라는 감은 안 열리고 잎만 무성하다 물동이 이고 오는 춘자 배가 앞산 만하다 개뿔이나 애를 뱄나 보름달을 뱄나 달달달..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6.04.04
가을, 캠퍼스 가을, 캠퍼스 / 김진학 가을은 나무들마다 형형색색을 뿌리고 있다 세월무상(歲月無常), 생각에 잠기어 교정을 걸으면 고운 단풍이 된 미니스커트가 우르르 몰려와 까르르르 웃음으로 내 주위를 싼다 어디, 학점이 애교로 되는가 힙합과 성형수술에 관심이 더 많은 아직도 덜 큰 아이들의 ..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4.07.21
여름, 종묘풍경 여름, 종묘풍경 / 김진학 몇 개의 고무 징을 놓고 구두 굽을 갈아주는 노인이 있는 그곳엔 나뭇잎들이 술렁인다 병에 냉커피를 담아 파는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며 교태를 부리는 여자가 있거나 잔치국수 한 그릇이 걸린 내기장기의 똑딱이는 소리가 차라리 쓸쓸하다 골목 앞에는 젊은 나..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3.04.27
재회 재회 / 김진학 당신을 보며 죽음을 생각합니다 내 세포하나하나에 박혀 있을 당신의 유전자를 생각합니다 용변을 받아내고 정신이 없으면서도 내 얼굴을 알아보는 당신은 시간의 외로움에 묻혔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여든 중반의 굴곡이 취한 시간들 사이에서 까마득히 당신의 젊..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3.02.17
이야기 시) 오랜 친구 오랜 친구 / 김진학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동대구역까지 마중 나온 20년 만에 만난 친구부부, 젖소 150마리의 농장과 영농법인을 운영하던 그들이 1990년대 말, 젖소파동으로 알거지가 된 후 천주교 은퇴신부님과 함께 7년간 산간오지에서 가톨릭피정센터와 청소년수련원을 만들었..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3.01.20
서울, 언더그라운드 서울, 언더그라운드 / 김진학 배터지게 가난한 곳 밤이면 사창가(私娼街)가 있고 날마다 빛나는 밤의 노래가 슬프게 들리는 곳 더는 허물어 질 곳이 없어 모여든 사람들이 있는 곳 대한민국 밑바닥인생들은 다 모이는 곳 쪽방이 가장 먼저 생긴 곳 겨울이면 노숙인의 동사자가 꼭 생기는 .. 사랑방/평화님의 선물 2012.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