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고궁나들이] .
소설인오늘 광화문거쳐
홍예문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수정전교태전 건천궁그리고
각누각들비원
구중궁궐을돌아서
경복궁사적117호
하늘이내린큰복을가진왕궁이라고합니다
아그리고지붕은웅장하면서도
조상들의해학이담겨있어
익살스렵고그리고아무리세찬비
가와도 풍수지리상 물이절대잠기지
않으며또한배수가잘된다고
언젠가기록한적이 있는데요
책자돈받고배부해요|\500원
만원짜리 부스려기싫어서 기억력더듬더듬
입장료 ₩3000원
관람시간동계11월12월
09.00~17.00
매주화요일은정기휴무
4대궁및종묘통합관람권₩10.000원 구입일부터1개월이내
경회루와향원정
외국의사신이나접대.연회장소 임금과신화
임진왜란때화재로소실되었지만
경복궁중건될때 연못은나라에가뭄이들때
기우제지내는곳으로이용 국보제224호
향원정보물제1761호
고종이건천궁을지을때 그앞에연못을파서
연못가운데섬을만들어2층의육모지붕얹은정원정
가는섬에는나무로 구름다리를만들어취향교라하였다
향원정의물은경회루의연지로흘러가도록되어있다
###매해고궁나들이했는데올해는향원정고운단풍은 모두말라있고시들어있었다###
오늘눈이온다는소설하지만 서울은비가왔었다
그리고 날씨도포근했다 두터운잠바를벗어던지고
조끼를입고 난늦가을의만추를 즐길려고
무작정나선다
날씨는흐렸지만 찬바람이불면
나한번쯤생각해줘요
따듯한커피가생각나면
나한번쯤생각해줘요
누군가가필요하다고 느껴질때
밥한끼라도먹고싶고
술한잔이라고 먹고싶을때
나한번생각해줘요
햇살이곱다고느꺼질때
나한번만생각해줘요
한걸음두걸음가다보니
경회루와 향원정 가슴
활짝펴고 한바퀴다돌았네
그련데무슨비오는날사람이
그렇게많은지
우리나라사람보다해외관광객
그리고관찰학습
뭐라고하죠현장학습인가
학부모와학생들도많았어요
전고궁은휙~~~꺼죽데기만구경
매해갔기에단풍찿으려 경회루
하지만향원정단풍은말라시들었어요
2014년11.22일
우리 아파트 나오면서 아직은 단풍잎이 곱습니다
조선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조선 제일의 법궁”
경복궁은 유교적 질서와 풍수적 건축 사상을 융합한 건축물이다. 궁
안의 주요 전각과 문들은 남북 직선 축에 맞추어 배치되었으며 각각의 공간을 행각이 감싸도록 했다. 또한 주요 정전과 침전 등을 남향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배치했고, ‘전조후침’이라 하여 정사를 보는 조정은 앞에 두고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은 뒤에 두어 내전, 외전 영역을 나누었다.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자 궁궐 건축의 모범으로 원칙과 절차를 엄수해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세설명
서울에는 조선시대 오대궁궐(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이 있으나 경복궁은 그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조선의 정궁이다. 1395년 초기 건축 이후 지속적으로 궁궐은 확장 되었으며,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중궁전(교태전) 뒤의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아관파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일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복궁 홈페이지 발췌
비가오는 데도 관람객이 많앗다 신기하게 주말이어서 그려냐
3호선 경복궁 5번출구로 나오니 여기
경복궁 표를 타기위해서 광화문 정문 방향으로 내려왔습니다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1916년 철거되었으나, 문민 정부 때 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후 2001년 10월 26일에 다시 흥례문을 복원하였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과 강령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2006년 12월까지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철거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 광화문은 철거되었고, 한일 병합 조약 100년인 2010년 8월 15일에, 기울어졌던 3.75도를 바로잡고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한국어 위키백과)
비가와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념사진 찍는다고 모두들 추억담느랴고
주말이어서그려나 관람객이 많았습니다
비가오는데도 신기하리 만치
근정전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정전으로 조하를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요한 의식이 거행되었던 곳입니다
사정전,,,경복궁의 편전으로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입니다. - 보물 제1759호
천추전,,,,편전일곽의 서편전에 해당하는 천추전으로 고종 2년(1865년)에 중건한 건물입니다
강녕전,,,,왕의 침전으로,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이곳입니다
수정전,,,세종대왕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고종 초기에는 침전으로 사용되고, 편전의 역할을 하였으며, 갑오개혁 시절에는 군국기무처 및 내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 보물 제1760호
경회루,,,경복궁 내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외국사신의 접대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던 장소입니다
교태전,,,왕비의 침전입니다.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아미산”이라고 합니다
자경전,,,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입니다. 뒤편에는 십장생과 박쥐문, 당초문을 새긴 굴뚝인 십장생 굴뚝이 있습니다
향원정,,,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지은 2층의 정자로,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구름다리가 있습니다. - 보물 제1761호
건청궁,,,고종 10년(1873년)에 지은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집옥재,,,집옥재는 협길당, 팔우정과 더불어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태원전,,,,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로, 후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자선당,,,자선당과 비현각은 동궁의 주 전각이다.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경복궁 홈페이지 발췌 )
머리글만 정리 ㅋㅋㅋ
각전각보다 저는 단풍볼려고 경회루있는 방향으로 옮겼습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
침전인 강녕전 서쪽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외국사신 또는 군신간의
연회장소이며,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정사를 바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사스러운 모임이 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경복궁 홈페이지발췌 )
경회루와향원정
외국의사신이나접대.연회장소 임금과신화
임진왜란때화재로소실되었지만
향원지와 향원정
경복궁중건될때 연못은나라에가뭄이들때
기우제지내는곳으로이용 국보제224호
향원정보물제1761호
고종이건천궁을지을때 그앞에연못을파서
연못가운데섬을만들어2층의육모지붕얹은정원정
가는섬에는나무로 구름다리를만들어취향교라하였다
향원정의물은경회루의연지로흘러가도록되어있다
###매해고궁나들이했는데올해는향원정고운단풍은 모두말라있고시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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