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소원
어느 날 50대 중반의 한 여인이 어둠 속에서 육교를 건너
고 있었다. 반대편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 그녀는 그만
발을 헛디뎌 계단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사고로 그녀는
왼쪽 발목을 심하게 삐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딸과 사위에게 그녀가 말했다.
"침 맞으면 돼. 손이 아니라 다행이다. 하늘이 내 소원을 알
고 있는 모양이야."
이틀날, 그녀는 시장의 좁은 떡가게에서 지팡이를 짚은 채
떡시루를 살피고 있었다. 왼쪽 발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걸음걸이는 무척 힘들어 보였다. 떡시루 옆의 쟁반에는 방금
전에 빚어놓은 송편들이 가득했다.
시간이 흘러가고, 어느 새 고단한 하루는 어둠 속에 묻혀 있
었다. 결혼 초부터 맞벌이 부부로 직장에 다니는 딸이 퇴근길
에 떡가게로 들어섰다.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를 집까지 직접
모시고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가 딸의 표정을 살피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른들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어서 가봐라. 나는 할 일이
더 있어."
어머니는 딸의 등을 떠밀었다. 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
머니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딸이 돌아가자 그
녀는 떡가게 구석에 앉아 팔고 남은 떡으로 저녁을 간단히 해
결했다. 그리고 서둘러 가게를 정리했다.
얼마 후 떡가게를 나선 그녀가 힘든 걸음걸이로 도착한 곳
은 시장 근처의 한 학원이었다. 그녀는 작은 가방을 든 채 야간
한글반으로 들어갔다. 맨 앞자리에 앉은 그녀는 가방을 열고
50대의 나이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
과서를 꺼냈다.
시간이 흘러 이튿날 정오가 되었다. 전날 등을 떠밀리며 돌
아섰던 딸이 몹시 굳어진 얼굴로 떡가게에 나타났다. 어머니는
아무 걱정도 말라는 듯 활짝 웃으며 딸을 맞이했다.
딸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시댁에서는 어머니가 글을 쓰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
고 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불편하신 몸으로 계속 학원에
다니시면 머지않아 시댁에서도 알게 될 거예요."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니?"
"어제 그냥 갈 수가 없어서 돌아오다가 학원으로 들어가시
는 어머니를 봤어요. 방금 전에 그 학원에 들러 다 확인했습니
다. 한 달째라고 하니 제발 그만 다니세요. 그 연세에 글을 배
워서 어디에 쓰시게요?"
어머니가 딸의 시선을 받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시댁에서 알면 부끄럽니? 그렇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
다. 더 늦기 전에 글을 배워야 돼."
딸은 몹시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섰다. 어머니는 더이상 숨
길 것이 없다는 듯 손님이 뜸할 때면 틈틈이 초등학교 1학년 국
어 교과서를 펼쳐놓았다. 눈과 입으로는 책을 읽었고, 송편을
빚던 손으로는 글쓰는 연습을 했다.
5개월 후, 그녀는 떡가게 일보다 더 힘든 야간 한글반을 마
쳤다. 그녀는 졸업 작품으로 6개월 전에 입대한 아들 앞으로
편지를 한 통 썼다. 그리고 담당 교사는 그 편지를 복사해 학원
게시판에 붙였다.
그 편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운 내 아들의 이름을 쓰게 되니 가슴이 설레는구나. 글을 쓰
지 못하며 살아온 세월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형형 색색으로
수를 놓던 세월이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네 아버지께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편지 한 장 보내지도 못했었지. 내달에는 송편을 빚
어 첫 면회를 갈 생각이다. 네 누이와 매형이 곁에 있어서 나는
아무 걱정이 없어. 군에 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려고 글을 배우기
시작한 엄마를 떠올리며 하루하루가 힘들어도·········.
야간 한글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꽃다발을 들고 학원에
온 그녀의 딸과 사위는 게시판 한쪽에 붙은 편지 복사본에 앞에
서 한동안 할 말을 잊은 채 서 있었다.
출처 : 아침을 여는 행복 편지(김승전 지음)
어머니의 마음
'사랑방 > 햇살님의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 (0) | 2010.03.30 |
---|---|
녹슨 외바퀴 수레 (0) | 2010.03.29 |
운동화가 녹인 세상 (0) | 2010.03.27 |
그러나, 그래도 (0) | 2010.03.26 |
당신이 나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0) | 201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