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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리와 장다리의 우정

doggya 2010. 4. 3. 10:26

 

 

거꾸리와 장다리의 우정

 

 

 

 근호는 병원 원무과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서 있었습니

다. 아내가 해산일이 되기 전에 심한 통증을 느껴 오늘 병원에

실려왔기 때문입니다. 근호가 이처럼 안절부절하는 데는 이유

가 있었습니다.

 

 근호는 난쟁이었습니다. 늘 남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살아왔

고, 자신의 의견은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특히 오늘 같

은 날 낯선 사람들 틈에서 무슨 일인가를 처리해야 할 때면 그

의 불안감은 더 심해졌습니다.

 

 의사도 간호사도 다들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한 근호는 한

참을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승연이니? 미안한데 좀 와줘야겠어. 지금 집사람이 병원에

실려왔거든······."

 

 근호에게는 승연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근호와 승연이

는 비슷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근호는 승연이를 세상

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로 생각했습니다.

 

 승연이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게다가 대학을 졸업하

고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근호에게는 세상에 승연이

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근호가 병원 흡연실에서 서성대고 있을 때 승연이가 들어섰

습니다. 근호의 얼굴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환해졌습니다.

 

 "미안해. 일하는 시간일 텐데."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구급차에 실려왔어. 그런데 의

사가 아무 말도 안 해줘."

 

 "응, 알았어. 내가 알아볼게. 여기서 기다려."

 

 승연이는 원무실에 들어가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위층으

로 올라갔습니다. 근호가 보기에 승연이는 언제나 믿음직스

러웠습니다. 늘 당당했고, 어디서도 주눅이 드는 적이 없었습

니다.

 

 얼마 있다가 승연이가 내려왔습니다.

 

 "지금 검사 끝났고,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아기가 자리

를 잘못 잡고 있어서 그런 것 같대. 큰 문제는 아니래. 걱정하

지마."

 

 "정말?"

 

 "그래."

 

 "고마워, 승연아."

 

 "참, 나 급한 취재가 있어서 지금 가봐야 되거든. 나중에 전

화하자."

 

 "응, 빨리 가봐."

 

 "내가 담당의사한테 잘 부탁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1025호 병실로 옮겼을 거야."

 

 근호와 승연이의 인연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근

호는 늘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 난쟁이였고 승연이는 공부 잘하

는 반장이었습니다. 둘이 친해진 건 중학교 3학년 가을 소풍

때였습니다.

 

 오랜만에 야외로 나간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며 넓은 잔디

밭에 모여 기마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승연이는 아이들의 어깨

에 올라앉아 제일 먼저 적진으로 돌격하는 대장이었습니다. 그

날도 승연이는 모자를 뒤로 돌려쓰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습니

다. 서로 소리를 지르고 뒤엉켜 깃발을 뺏으려고 한참 실랑이

를 하던 중 말 몇 개가 동시에 무너졌습니다. 갑자기 비명이 들

렸고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갔습니다.

 

 "애들아, 괜찮니?"

 

 "선생님, 반장이 밑에 깔려 있어요."

 

 아이들이 옷을 털고 일어나자 맨 밑에 있는 승연이가 보였습

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코에서 피가 나고 있었습니다.

 

 "애들아, 비켜라."

 

 선생님은 승연이를 업고 큰길 쪽으로 뛰었습니다. 아이들

이 웅성거리며 따라갔고, 선생님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습

니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승연이 옆에는 어머니와 선생님이 계

셨습니다.

 

 "괜찮니, 승연아? 십년감수하는 줄 알았다. 어머님, 죄송합

니다. 제가 잘 챙겼어야 하는데······."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얘들이 다 이러면서 크는 거죠."

 

 그날 밤 승연이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온 승연이가 엄마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누웠을 때 초인종 소

리가 들렸습니다.

 

 "이 밤에 누구지?"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문 앞에는 근호가 서 있었

습니다.

 

 "넌 누구니?"

 

 "승연이랑 같은 반 친구 근호예요. 이걸 전해주려고요. 아무

도 안 챙기길래······."

 

 근호의 손에는 승연이의 소풍가방, 흙 묻은 모자, 줄이 끊어

진 시계가 들려 있었습니다.

 

 "참 고맙구나. 여기까지 왔는데 친구 얼굴은 보고 가야지.

들어와라."

 

 방에 들어서는 근호를 보고 승연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근호야, 너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니?"

 

 "응, 전에 목욕탕 옆 파란대문 큰 집이 너네 집이라는 걸 애

들한테 들은 적이 있어서······.그럼 갈게. 내일 학교는 올 수

있지. 학교에서 보자."

 

 "좀 놀다 가."

 

 "아니야. 너무 늦었어."

 

 근호를 배웅하고 돌아온 어머니가 입을 떼셨습니다.

 

 "착한 아이 같은데 안됐구나. 난쟁이라니."

 

 "네, 정말 착해요. 그런데 집도 가난하고······."

 

 그날 이후 둘은 늘 붙어다녔습니다. 친구들이 아무리 '거꾸

리와 장다리' 라고 놀려도 둘은 어디든 함께 다녔습니다.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승연이가 뒤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예전처럼 근호를 놀리지 못했습니다.

 

 승연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근호가 특수학교에 진학해

서로 헤어졌을 때에도 둘은 여전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승연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가장 기뻐

했으며, 승연이가 학생시위에 가담한 일로 경찰서에 있을 때도

가장 먼저 달려왔습니다. 또한 승연이가 대학교 2학년을 마치

고 군대에 갈 때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도 근호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손재주가 좋았던 근호는 목공소 주인이 됐고,

승연이는 신문기자가 됐습니다.

 

 승연이가 결혼을 했을 때 근호는 손재주를 발휘하여 신혼집

을 예쁘게 꾸몄습니다. 작은 전등갓에서 선반까지, 베란다의

세탁기 받침대에서 작은 밥상까지 모두 근호의 손으로 만들어

진 것이었습니다.

 

 승연이는 늘 근호의 후견인 역활을 했습니다. 은행에서 난쟁

이인 근호에게 색안경을 끼고 대출을 안 해주려고 할 때도, 상

가 건물 한 칸을 얻어 목공소를 차릴 때도 발벗고 나섰습니다.

 

 근호도 특수학교에서 만난 아가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

혼식 사회는 당연히 승연이의 몫이었고, 축가도 불렀습니다.

 

 그렇게 둘의 우정은 양쪽 집에 걸려 있는 '거꾸리와 장다

리' 라는 제목이 붙은 흑백 기념사진처럼 시간이 갈수록 깊고

따뜻해졌습니다.

 

 그런던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둘은 오랜만에 한 해를 보내

는 기념으로 등산을 갔습니다. 산행 목적지는 눈이 예쁘게 쌓

여 있는 서울 근교의 산이었습니다. 다섯 시간 정도 산행을 예

상했기 때문에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산이라 더욱 좋았습니다. 남들

이 밟지 않은 눈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내며, 등성이마다 피어

있는 눈꽃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냥 행복했습니다.

 

 근호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둘의 걸음은 느렸지만

마음만은 평화로웠습니다.

 

 "근호야, 좀 서둘러야겠다. 매봉까지 갔다가 내려오려면."

 

 "그래, 서두르자."

 

 "저기 보이는 게 매봉 맞지?"

 

 "응, 아까 하산하던 사람한테 물어봤을 때 한 2킬로미터 더

가면 보일 거라도 그랬거든."

 

 "야, 멀리서 봐도 참 멋있는 봉우리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갔을까. 둘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근호야, 매봉이 안 보인다."

 

 "코 앞까지 와서 안 보이는 거겠지. 저쪽 바위만 돌아서면

보일 것 같은데."

 

 둘은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바위를 돌아서 한참을

갔는데도 매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겁이 덜컥 난 승연이가 말했습니다.

 

 "야, 안 되겠다. 일단 매봉은 포기하고 내려가자. 좀 있으면

어두워지겠어."

 

 "그래, 빨리 내려가자. 기분이 이상하다."

 

 둘이 발걸음을 재촉했을 때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습

니다.

 

 "그런데 이 길이 맞니? 아까 왔던 길이 아닌 것 같아. 웬지

낯설어."

 

 "그러게 이상하다."

 

 "아까 잠깐 쉬었던 소나무 밑에서부터 잘못 온 것 같은데."

 

 "그럼 다시 그곳까지 가보자. 이거 큰일났네."

 

 다시 발걸음을 돌렸지만 이제는 그 커다란 소나무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고 둘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구조요청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근호야, 조금만 더 길을 찾아보자."

 

 "우린 랜턴도 없잖아."

 

 "참, 그렇지."

 

 그 순간 앞서서 뛰다시피 산을 내려가던 승연이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어어어······ 앗!"

 

 큰 바위를 돌아서던 승연이가 미끄러진 것이었습니다. 근호

가 기다시피 30미터쯤 되는 벼랑 밑으로 내려갔을 때 승연이는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다쳐 있었습니다.

 

 "몸은 괜찮아?"

 

 "다리가 이상해. 부러진 것 같아."

 

 "가만있어."

 

 근호가 휴대폰으로 119 구조대에 신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산도 아니고 초행이라 도저히 있는 장소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렵게 위치를 설명하고 둘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산은 캄캄해진 다음이었습니다. 구조대와

몇 번이나 통화를 했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

았습니다. 승연이의 통증은 심해지고 있었고. 몸도 얼어붙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간 큰일나겠다. 승연아, 내가 내려가서 사람들을 데

리고 오는 게 낫겠다. 조금만 참고 기다릴 수 있지?"

 

 "그래."

 

 막 일어서는 근호를 승연이가 다시 불러 세웠습니다.

 

 "근호야, 할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나보고 언제나 그랬어.

근호 보호자냐고. 그럴 때마다 난 그랬어. 근호가 있는 게 내게

더 큰 힘이 된다고······.정말이야."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냐. 이 바보야."

 

 근호가 산을 내려간 지 얼마나 흘렀을까. 옴몸이 굳어버린

승연인는 이젠 정신마저 혼미해지고 있었습니다.

 

 "승연아."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예요. 여기."

 

 근호가 작은 몸으로 승연이를 끌어안았습니다.

 

 "무서웠지. 하나도 안 무서웠어. 너는 약속을 어긴 적이 한 번

도 없었잖아."

 

 거꾸리와 장다리는 또 그렇게 우정을 확인하며 한 해를 보

내고 있었습니다.

 

 

출처 : 한 달이 행복한 책 (유 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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