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 오이병
녀석은 약골이었습니다. 이제 갓 우리 소대에 전입해온 녀
석은 저런 놈이 어떻게 군대에 왔나 싶을 정도로 몸은 약해빠
졌고 정신력도 강해보이지 않았습니다. 녀석은 우리 소대의 애
물단지였습니다.
녀석 때문에 뻔질나게 단체기합을 받아야 했고, 뭘 해도 우
리 소대는 대대에서 늘 꼴찌를 했습니다. 녀석은 워낙 주눅이
들어 있어 일조점호나 일석점호 때 실수하기 일쑤였습니다. 녀
석의 실수는 늘 우리의 단체기합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모두
녀석을 미워했습니다. 녀석의 이름은 오민철이었습니다.
"어휴, 저놈 부모는 자식이 저 모양인데 어떻게 군대를 보냈
냐. 군대를 빼주든가 하지."
"그러게, 이게 뭐야. 지 고생하고 우리 고생하고."
"야, 저놈 집구석도 변변히 않은 모양이더라. 그나마 군대에
와서 밥이나 먹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소대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마음 한구석이 아팠
습니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민철이가 미운 건 어쩔 수
가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내무반에서 오민철 이병을 챙겨주고 돌봐주는 사
람은 김병장이었습니다. 녀석 때문에 다른 소대원들이 불만을
터뜨릴 때도 늘 녀석 편을 들며 감싸주었습니다.
"야, 놔둬라. 자기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이번 무장구보에서도 우리 소대는 분명히 꼴찌일 겁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 오이병 저놈은 속으로 얼마나 미안
하겠냐."
김병장은 별명이 '교장선생님' 이었습니다. 늘 점잖았고 단
한 번도 후임병들을 괴롭힌 적이 없었습니다. 제대가 얼마 남
지 않았지만 마음이나 행동은 한결같았으며 한마디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름 전투검열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들이야 간신
히 넘어갈 수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10킬로미터 무장구보였
습니다. 완전군장을 하고 10킬로미터를 뛰는 일은 튼튼한 우리
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녀석은 낙오할 것이 분명했고,
낙오자가 생긴 소대는 심한 기합과 질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
다. 드디어 무장구보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내무반장은 일부러 녀석을 소대 중간에 배치하여 녀석이 지
치기 시작하면 양쪽에서 두 사람이 부축하도록 했습니다.
불과 2킬로미터도 안 뛰었을 때 녀석은 비틀대기 시작했습
니다. 대열에 묻혀 겨우 발은 내딛었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녀석의 눈빛은 희미해져 갔고 다리도 거의 풀려서
누군가 살짝 건드리면 당장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옆에서 뛰
는 소대원들이 부축하는 데도 한 계가 있었습니다.
그때 부대 깃발을 들고 대열 밖에서 뛰던 김병장이 녀석의
군장을 벗겨 자기가 둘레메고는 외쳤습니다.
"야, 보폭 줄이고 속도 늦춰"
"군가하고 박자가 안 맞습니다."
"군가도 느리게 부르면 되잖아."
"다 함께 천천히 뛰자. 우리가 오이병에게 맞추는 거야. 미
우나 고우나 우리 소대원이야."
기상천외한 구보가 시작됐습니다. 늘 부르던 것보다 두 배
는 느리게 군가를 불러야 했고, 모두 녀석의 보폭과 속도에 맞
추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소대들도 모두 우리를 앞질러 갔습니
다. 남들이 보기에 우스워보였겠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녀석을
흉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소대가 연병장에 들어섰을 때 먼저 도착해 휴식을 취
하고 있던 병사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보~오~람~찬 하~루~일~을······."
우리가 부르는 군가는 거의 판소리 수준이었고, 우리가 달
리는 모습은 슬로우 모션에 가까웠습니다. 소대가 사열대 앞에
이르렀을 때 연대장과 대대장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배어 나왔
습니다.
그날 일과를 끝내는 자리에서 연대장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낙오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민철
이가 있는 2중대 3소대도 낙오자가 없었다. 너희들이야말로 정
말 진정한 군인이다."
우리는 그날 너무나 소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내무반에 들
어 왔을 때 우리를 집합시킨 김병장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처럼. 소대원도 선택하
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리 못난 부모도 사랑하는 나의 부모인
것처럼 소대원도 마찬가지다. 오민철이 우리 소대에 있는 한
녀석은 우리의 소대원이다. 돈과 권력으로 군대를 피해간 수많
은 놈보다 오이병이 훨씬 용기 있는 남자다. 너희들에게 꼭 부
탁하고 싶은 게 있다. 내가 제대하더라도 오이병에게 좋은 소
대원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날 이후 녀석은 진정한 우리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의 젊은 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출처 : 한 달이 행복한 책 (유 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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