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분노와 슬픔
친절한 마음가짐의 원리,
타인에 대한 존경은.
처세법의 제일 조건이다.
-H. F. 아미엘(스위스의 프랑스계 문학자 · 철학자)
한 대학교 동아리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노인복지시설로 자원
봉사를 나갔다.
무의탁 노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복지시설의 환경은 열악했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노인들을 보살펴야하기 때문이었다.
동아리의 리더인 진우는 그 복지시설에서 가장 몸이 불편한
82세의 할머니를 담당하겠다고 자원했다.
그 할머니의 모습이 어린시절 자신을 키워준, 돌아가신 할머니
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복지시설 원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 저 할머니는 우리 복지시설에 온지 3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대
소변도 가리지 못하고요. 학생의 마음은 가상하지만 다른 분을
보살펴드리세요. 저 분은 우리 직원들이 돌볼 테니까요."
그러나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보겠습니다. 힘에 부치면 도
움을 청할께요."
진우는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저는 김진우입니다. 대학교 3학년이고요.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할머니는 진우를 힐끗 쳐다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외면했다.
진우는 개의치 않고 정성을 다해 할머니의 손발을 씻겨드리고 휠
체어에 태워서 밖으로 나갔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방안에만 있다가 모처럼 바깥 공기를
쐬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할머니의 일그러진 표정은 펴질 줄 몰랐고, 꽉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진우는 할머니의 경직된 얼굴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온화한 표
정과 미소를 찾아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다음날부터 진우는 돌아가신 친할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팔
다리를 주물러드리며 다정하게 자신이 겪은 그날그날의 이야기
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할머니의 일그러진 표정이 날이 갈수록 점차 온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날, 할머니가 먼저 진우의 손을 덥석 잡
았다. 그리고는 3년 동안 꽉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학생, 정말 고마워. 자네가 내 자식들보다 나아."
그렇게 말문이 트인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봇물처
럼 쏟아놓았다.
15살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
며 4남매를 낳아서 정성스럽게 길렀다고 했다. 그런데 3년 전에
약간의 치매증상을 보이자 자식들은 서로 모시기를 꺼려했고, 결
국 짐짝 취급을 받아 거리에 버려졌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무려 3시간에 걸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야
기 중에 절반은 반복되는 이야기여서 짜증이 났지만 진우는 싫은
내색 없이 끝까지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마친 할머니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 정말 고맙네. 8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라네."
"예, 앞으로도 마음속에 묻어둔 말씀이 있으시면 개의치 말고
하세요. 제가 다 들어드릴게요."
그날 이후로 할머니의 건강은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다.
이윽고 여름방학이 끝났을 즈음, 할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짜증내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여유는 건강의 에너지이며, 자신의 심신이 건
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대방이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끝까지 들어주는 여유를 가지면 누구에게나 신뢰받을
수 있고, 더불어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복 (박정혜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