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와 실장갑
거리에는 아름다운 캐럴이 울려 퍼지고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로 넘쳐났다. 크리스마스 날에 하얀 눈을 기대했지만 아직 눈은
오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사람들 사이로, 종욱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제기랄, 뭐가 그리 좋다고 난리법석이야!"
종욱은 잔뜩 인상을 쓰며 식당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허기를 채울까,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식당에 들어갈
텐데 종욱의 주머니에는 단돈 백 원짜리 하나도 없었다. 벌써 노
숙 생활을 한 지 석 달이 되었다.
"오늘은 어디서 밥을 얻어먹지?"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밥을 먹고 도망치는 것도 이제는 겁이 났
다. 지난번에 식당 주인에게 두들겨 맞은 후, 그 일도 맘대로 하지
못하게 됐다.
종욱은 식당 유리를 통해 주인이 선하게 생겼는지를 먼저 파악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야 나중에 도망쳤다가 붙잡혀도 욕을 덜
얻어먹기 때문이다. 식당 여러 군데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걷다 보
니 어느새 삼각지 동네까지 왔다.
"어, 저기가 좋겠군."
종욱은 허름한 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다행히 주인은 할머니였
다. 종욱이 문을 열려는 순간, 인근 교회에서 흘러나온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닿앗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종욱은 가족들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회사가 부도만 나
지 않았어도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냈을 텐데 그럴 수 없다
는 게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 여기 칼국수 하나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잠시 뒤, 큰 그릇 가득 푸짐하게 담긴 칼국수가 나왔다. 종욱은
고개를 처박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쫄깃하면서도 얼큰한 게
마치 예전에 외할머니가 끓여 주신 칼국수 같았다.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입천장 다 데겠어요."
할머니는 종욱의 먹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금세 종욱은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부족해요? 내가 한 그릇 더 줄게요."
"···전 한 그릇만 시켰는데."
"괜찮아요. 난 잘 먹는 사람이 제일 좋아요. 그러니 한 그릇 더
먹어요."
종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그릇 먹고 도망가기도 사실 부끄럽고 미안한 일인데 두 그릇이
나 먹고 도망간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죄를 두 배나 짓
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방 눈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칼국
수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종욱은 금세 또 한 그릇을 비
웠다. 배가 불렀고 온몸이 따뜻했다.
"잘 드셨수?"
"예, 할머니. 배불리 잘 먹었습니다."
종욱은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할머니를 힐끔힐끔 쳐
다봤다. 그러자 할머니는 종욱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따뜻하게
말했다.
"오늘은 공짜예요. 일 년에 단 하루 공짜로 음식을 대접하는데
바로 그날이 오늘이에요."
사실 종욱을 위해 할머니가 일부러 지어낸 말이었다.
"···예? 공짜라고요" 가, 감사합니다. 할머니."
"아니에요. 맛있게 먹었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자, 이것도 받으
세요."
할머니는 종욱에게 실장갑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죠?"
"오늘 밤에는 눈 온다고 그러는데 이거라도 끼고 있어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고맙습니다. 잘 끼겠습니다. 그리고 잘 먹고 갑니다."
종욱은 거듭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는 할머
니가 주신 실장갑을 끼고 양손을 볼에 갖다 댔다. 할머니의 배려
만큼이나 참으로 따뜻했다. 그리고 종욱은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따라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이제 다시 무언가를 새롭
게 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쁠 때는 가만히 있어도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마련입니다.그
러나 괴롭거나 힘들 땐 어떻습니까? 콧노래는커녕 다른 누군가의 기
쁨이 신경 쓰이고 거슬립니다.
우리 인생을 봅시다. 돌아보면 기쁜 날보다 괴롭고 힘든 날이 더 많
은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잔뜩 얼굴 찌푸리고 살 수만은
없습니다. 힘들수록, 괴로울수록 노래를 합시다. 콧노래를 흥얼거립
시다. 그 노래로 인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
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엄마, 정말 미안해(김현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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