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기우는 아이, 희망 만드는 엄마
아이를 등교시키려고 현관을 나서
는데, 같은 층에 사는 반장 친구가 다가온다.
"아줌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끝나면 데리고 올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안심이 된다. 아이는 친구 손에 이끌려 소걸음으로 학교에 간다.
베란다 창문을 여니 2층까지 올라온 환한 백목련이 울적한 마음을
달래준다. 비로소 반 엄마들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그 용기가 내 걸음을 떠다민다.
약속 장소인 음식점에 도착하니 엄마 여럿이 모여 있다. 내가 들어
서는 순간, 떠들썩한 대화가 멈추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늘 말썽 많고 힘든 아이의 엄마입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자폐 증
세 때문에 아이가 수업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나
름대로 열심히 혼내면서 고쳐보려 했는데 잘 안 되네요."
자존심을 버린 지 오래이지만, 해마다 겪는 이런 분위기에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화사한 꽃무늬 옷차림
을 한 어머니가 말한다.
"초등학생으로 치면 고학년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실력이 안 되면, 저학년 수업을 받는 게 낫지 않겠어요?"
옆에 앉아 있는 엄마가 한술 더 뜬다.
"일반 아이들도 학원이나 과외를 받아야만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데,
댁의 아이는 방과 후에 따로 수업을 받는 게 있나요?"
할퀸 상처에 소금을 붓는 것 같다.
"다행히 남자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6학년을 잘 보낼 것 같네요. 반
에서 하는 일이라면 적극 참여할 테니,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철판을 깐 낯두꺼운 얼굴이 되어 전화번호를 남기고 일어서려는데
반장 엄마가 붙잡는다.
"같은 방향인데 조금 더 앉아 있다가 같이 가요."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제가 옆에 살아서 잘 아는데, 장애가 있어서 수업이 안 되는 거지
마음은 착하잖아요. 누구 때리는 일도 없고 왕따 시키는 일도 없잖아
요. 건강하게 잘 있다가도 교통사고 당해서 장애인 된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도 언제 그렇게 될지 누가 알아요?"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는다. 반장 엄마가 내친 김에 몇
마디 더 한다.
"담임 선생님도 반 아이들이 서로 가르쳐주려고 하고 가방도 챙겨주
고 한다면서, 남을 도와주려는 예쁜 마음을 갖게 해주는 산 교육이 따
로 없다고 하시던걸 뭐."
초등학교 통합교육이 시작되어 일반 아이들과 한 반이 되면서부터는,
매년 학년이 바뀔 때마다 이런 모임에 참석해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으레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나왔는데도 그 자리가 가
시 방석 같아 결국 먼저 일어서고야 말았다.
미식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고 학교에 갔다. 봄볕 가득한 운동장에는
팔을 걷은 채 축구하느라 뛰어다니는 아이들 소리로 생동감이 넘쳤다.
점심 무렵 식당을 기웃거려 보았다. 삼삼오오 떠들면서 밥을 먹는
아이들 너머로 혼자 앉아 식판의 밥을 천천히 떠먹는 아들이 보였다.
아이에게 물이라도 한 컵 갖다 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힘내. 친구 없는 너에게 엄마가 평생 친구가 되어줄게. 6년을 깨지
고 부딪히면서 여기까지 버텨왔는데 이제 졸업반이잖아. 그때까지 힘
들지만 이겨내자.'
그렇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담
임 선생님이었다.
"또 오셨어요? 이제 잘 적응하고 있어요. 걱정 마시고 댁에 가서 기
다리세요. 어머님 손이 필요하면 연락 드릴 테니 안심하시고 가세요."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등을 떠밀었다.
집에 와서 껄끄러운 입맛을 물에 만 밥으로 달래고 있는데 아이가
울면서 돌아왔다.
"엉~ 엉 ~, 학교 가기 싫어. 때려. 바보래. 공부 싫어. 싫어, 싫어."
소파에 엎드려 손에 잡힌 쿠션을 힘껏 뜯는다. 갈기갈기 찢어 어지
럽히며 분풀이를 한다. 장애의 허물에 갇혀 반 친구들에게 뜯긴 상처
가 솜뭉치처럼 거실에 뒹군다.
'그래. 너나 나나 왕따 당하는 신세는 같구나. 나는 반 엄마들한테
왕따 당하고, 너는 아이들한테 왕따 당하고······.'
솜뭉치들을 뭉쳐 눈덩이처럼 만들어서 아이에게 던졌다. 눈싸움이
되었다. 뜯고, 뭉치고, 던지고 깔깔거리면서 뒹군다. 그렇게 울고 웃
다보니 시커멓게 타 들어가던 속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뻐꾸기 시계가
저녁 할 시간을 알려준 다음에야, 온몸에 엉겨 붙은 솜뭉치를 뜯어 찢
어진 천 조각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 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이가 갑자기 반짇고리에서 바늘
과 실을 꺼내든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는 주삿바늘을 몹시도 싫어
해서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장애를 고쳐보려는 마음에 용하다
는 침술가며 수많은 병원을 찾아서인지, 아이는 뾰족한 것만 보아도 도
망을 가던 터였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쓰레기통에 버린 천 조각을 쏟
아놓고는 바늘로 기우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바늘이 무서워 진땀을
흘리면서 덜덜 떠는 서툰 손으로 꼼지락거린다. 바늘에 손이 찔렸다.
"엄마! 피나, 아파."
도움을 청하는 얼굴을 외면하면서 가슴을 조아렸다.
저녁 식탁이 차려졌는데도 아이의 바느질은 끝나지 않았고, 아이 곁
에 널브러진 화장지에는 붉은 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천 조각이 너덜너덜 이어지고 종이 풀로 벌어진 틈이 붙여지면서, 아
이의 구겨졌던 얼굴이 점점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머리가 장애라면 손으로라도 해보자."
갑자기 눈앞이 탁 트였다.
하품하는 아들에게 솜이 여기저기 삐져나온 누더기 쿠션을 안겨주니,
꼭 끌어안고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진다.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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