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행복님의 삶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

doggya 2019. 12. 31. 11:41

다시중앙주차장지나서 북문 으로~~~고고씽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

우리는 늦게   출발했기에    성곽을  트래킹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중앙주차장에서  동문으로   아래로향하고    ,

돌탑공원에서  돌탑의 매력에  빠져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또다시  북문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남한산성 옛길 소개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후기 10대로 중 하나인 봉화로의 일부 노선으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 중 하나였습니다. 봉화로의 일부 구간과 주변의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들을 연결해 탄생시킨 것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왕들이 여주의 영릉을 참배하러 갈 때, 보부상들이 보따리를 지고 인근 장터를 떠돌 때,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할 때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남한산성 옛길은 지난 시절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습니다. 동서남북 4개의 특색 있는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는 동시에, 바쁜 일상생활 속 휴식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동문길 (약 9.5km)
남한산성 동문 ~ 산성로터리 ~ 북문 ~ 서문 ~ 남문 순환

남한산성 동문길은 남한산성 동문(좌익문)에서 시작하여 남한산성 로터리를 지나 북·서·남문을 지나는 순환길입니다. 동문길 구간에는 옛날 고관들이 풍류를 즐겼던 지수당과, 군사훈련 시설이었던 연무관 등 남한산성 내 다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문길 (약 2.1km)
송파구 거여동 ~ 남한산성 서문

남한산성 서문길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 서문(우익문)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감이동 초입에는 먹자 골목이 형성되어 있으며, 서문으로 오르면서 남한산성의 다양한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남문길 (약 6.5km)
성남∙하남∙위례동 주민센터 ~ 위례 성복교회 ~ 남한산성 남문

남한산성 남문길은 위례신도시 위례성복교회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 남문(지화문)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남문길 초입에서 바위에 글귀를 새겨놓은 금석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북문길 (약 5.8km)
광주향교 ~ 남한산성 북문

남한산성 북문길은 광주시 광주향교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 북문(전승문)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북문길 초입에 위치한 광주향교와 상사창동 연자마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남한산성   홈페이지서 발췌  



참고해보셔요 





남문은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망월사가  의정부에있는줄 알았는데   남한산성에도있네요  

남한산성의 절들은    호국 사찰이다 보니  수행이나  도량이아니라  

군기와    화약을 보관  

징집된  승군의   숙식을  해결    훈련하기 위한장소   라서 

1970년도에는   일제는  조선의 군대를  강제해산   

산성의 모든  사찰을 폭파해 버렸다고합니다   


#남한산성 망월사 

조선태조가   창건한 남한산성 망월사는

일제의해서  강제페사  33년에걸쳐서  성법스님이 복원

남한산성에 서가장오래된 사찰이라고합니다

임진왜란이후   승병대장의   지휘소 역활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되는 아픔 을겪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은 서기672년에  당나라군들을막기위하여  축조 

조선시대   선조대왕에서  순조대왕까지   국빙의 보류 

인조대왕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의회오리   이곳 남한산성에

보냈다고합니다

장경사 (Temple Janggyeongsa)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5호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승려 벽암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 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 16년(1638)에 건립한 절이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짧은 툇마루를 내었으며 2쪽 미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요사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의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산신각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으로 좌우에는 밑이 둥근 바람막이를 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정면 2칸에는 2쪽 여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현재 장경사만이 유일하게 옛 모습이 남아 있다.

 




 

망월사 (Temle mangwolsa) 경기도 기념물 제 111호

남한산성 내에 있는 10개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로 망월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곳에 있던 불상, 금자화엄경 등을 옮겨 창건하였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이후에 복원된 것이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4종의 복원된 건물의 규모가 옛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웅전, 금당, 요사체 2동, 13층 적멸보궁탑과 병풍석은 망월사의 자랑이다. 망월사의 돌축대는 옛 망월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하며 대형 맷돌이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남한 산성  홈페이지서  발췌  )

일제강점시대

일제강점시대 남한산성 사진

개항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외세, 그 중에서도 일본은 점차 침략자로서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이후 척사사상을 갖고 있는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항쟁이 펼쳐졌다.
1896년 봉기한 경기의병의 의병투쟁 거점은 남한산성이었다. 경기의병이 남한산성에 집결한 것은 2월 23일이었으며 2월 28일 이천의병부대와 합세하여 남한산성을 완전히 점거하였다.
그후 서울진공계획이 있었으나 관군에 체포되어 회유된 김귀성이 남한산성 서쪽 성벽에 파손된 사실을 관군에게 알렸고, 이곳을 통하여 관군이 일시에 남한산성 내로 진격하였기 때문에 남한산성은 함락되어 서울진공작전은 무산되었다.
그후 일본은 1907년 8월 1일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군대 관활하에 있던 병기와 탄약을 모두 회수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의 각 사찰에 보관중인 무기와 탄약은 신속히 제거하기위해 일본군에의해 폭파되었다. 이후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3·1운동이 펼쳐졌다.
이 날 시위는 새벽 남한산성에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남한산성 남문 아래 계곡에 중부면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후,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면사무소를 향해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1930년대 들어 남한산성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당시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운동을 주도하였는데, 남한산성내에도 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민족운동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중심이 되어 중부면 산성리에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가 그것이다.
노동자·농민을 의식화시키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자, 지하로 잠적하였다. 그러나 수년 후 다시 조직을 재건, 광주공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1934년 12월에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월 1회씩 노동회관에 모여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노동야학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선전물을 제작 배포하였으며, 서울 영등포와 인천 등지에까지 조직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936년 1월 조직원이 실수로 노상에서 분실한 조직관련 물건이 일본경찰 손에 우연히 들어가 조직은 붕괴되고 말았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조직된 운동단체가 공장 밀집지역인 영등포와 인천에까지 조직원을 파견하였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점이다.

(남한 선성  홈페이지서  발췌  )





나라가   있어야   불교도  있고 사찰도  있다 

장경사    망월사   동림사    옥정사  개원사   한흥사 

남단사   천주사      국청사  영월사   무려10개나  있다고 적혀있네요

사진  크게  확대해서  보았어요  ㅋㅋㅋ


호국불교의 성지라는  신앙적인측면에서   실질적이이유이고 

승군의편성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초토화  그래서 조선은 군사의필요성

느끼고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스님들은 목탁대신에  사람을살리는 활인검  

들고  의병과함께   큰활약을 함 


임진왜란이 끝나고   인조는  1624년  남한산성 축성  임진왜란 승병 조직적으로 

활용한 계획세워서   그래서남한산성 사찰  (늦게개설된 창건된 영원사 제외)

들어서게 됩니다    8도   승병들의  주둔지로    8개의사찰   배치되었고  

총괄본부      역활을 하는   사찰이    하나추가되어서     9개가 된것입니다 

(글자가  잘안보이지만  확대해보니  대강 이렇게  적혀있어요  )

실제로  사찰은   하나도   관람하지는 않았답니다   


남한산성  절만  관람  하려고해도   몇날 며칠이겠네요 

이정도로  만족하고요  제동선만 보여 드립니다 

옆에는  경찰서도  있고 119 소방서  도  있는것 같았어요 

주변으로는 당연히   카페와  음식점이  즐비하고요  


남한산성은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릅니다. 이것은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병자호란 등의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단계별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습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하여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남한산성    홈페이지에서일부만  발췌  )

건물이  잘생겨서 무엇인가  가보았더니 관리소였습니다  







남한산성도   세계유산에  등재 되어있다고합니다   

남한산성은 도립공원  월요일은  휴일이라고  합니다 







교회도   신기하게  생겼어요 







저위로  보이는  소나무숲이  아름다워서요 


북문으로  올라가는길은   음식점과  카페   산장이 많았습니



음식점과      산장도  보이고요 북문올라가는길에는요 






다양한  음식점  








시간  관계상  성곽길은  투어하지않았습니다 



올라오니  북문   안내표시가  나타납니다   



북문벽입니다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참패였다고합니다  

조선군은 전멸 했다고합니다    병자호란    역사의  치욕적인  사건  전쟁


그날 눈이 와 서  응달이고  눈이그대로    입니다 

길은  조금  미끄렸어요   낙엽이라도 밟으면  쭈루륵 

미끄려지기도   ~~~~~~




요즘  뜨고있는  신도시 위례  ~~~~~~~~~ㅎㅎㅎ 


성벽돌에   이끼입니다   ~~~~~~~돌하나하나로  성벽이 만들어져있었어요 



북문   현판이  아직은 안보입니다 


북문   표시만요   보고서 북문인줄 알았습니다 




깃발  입니다 



북문  천장입니다 




제가북문을  다녀왔길래  아래에서 만난 분들  셀카찍으시는 분들  

우리 남한산성 다녀온거야    해서 저도자신있게    다녀온것입니다    

말할수  있었답니다  열심히     사진찍는 분들을 위해서  다올라오시지도 

 않고서 미소지으면서    저도내려왔습니다  답례해주고서요 







인적이  없길래  눈이 그데로  ~~~~~~













북문

#전승문  현판이   보입니다


저혼자   신기해서   성문 돌들을 어루만지고  있네요 

호기심   이끼도    있었어요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대문이 있는

데 그중,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

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던 문입니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서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

"전승문" 이라고도 하였는데, 당시 영의정 김

의 주장에 의해 조선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


고 나가 청나라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서 조선군은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

를 법화골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

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

였습니다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한것

은 그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조선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등,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년)

에 신축된 성문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북문 이야기였습니다.



북문을   관람하고   우리는   남문을  향합니다

자   구경은 잘하셨나요  

*일행 3명   사진사는 사진이 없습니다  ㅋㅋㅋㅋ 


2019년    12.19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