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호인7님의 여행

이중섭부부의 교류와 중섭 그림 내용

doggya 2021. 11. 28. 07:00

이중섭부부의 교류와 중섭그림내용

                                                                         Dr. Gold

 

  이중섭은 함경도가 고향이었다.  평북 정주 오산고를 졸업한후 1936년 일본에

미술공부를 하러 떠났다. 

처음 제국미술학교( 현 무사시노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거기에서 고된 입학신고식에

질렸다.  1년도 되지 않아 그는 문화학원으로 적을 옮겼다. 이것은 그에게 '신의 한수"가

되었다.  설립자 니시무라 이사쿠라(1884~1953)는 원래 건축가로 미술, 문학, 음악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교육기관 창설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진보주의자로 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야마모도 마사코(현재 100세)를 만난

것도 이 학교에서였다. 마사코는 1938년 학교의 공용 세면대에서  붓을 씻으며 선배

이중섭을 대면하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중섭이 나중에 겪은 가난과는 달리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한 지주집안이었다.

그가 일본에 유학하였을 당시 그의 집안사람들은 이십여 명이 일본에 유학하였을   

정도였다. 일제가 전쟁중에 문화학원이 페쇄되자 이중섭은 귀국하였다.  이중섭이

결혼을 재촉하자 마사코는 1945년 관부연락선을 타고 귀국해서 서울에서 만났다. 

이중섭은 아내가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인물이라 하여 남덕(南德)이라고 불렀다.

 

  그의 그림 기법은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독창적으로

변형하였다.  그가 은박지에 그린 그림은 한국의 은상감기법을 연상시켰다.  그는

서양인이 그리지 못하는 한국적인 테마를 골라서 힘찬 흰소 등을 그리는데 몰두하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직하고 융통성 없는 그의 성격은 한국전쟁을 겪어내는 데는 부족하여

마사코는 길거리에서 재봉일을 하는 등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중섭은 아내가 일본에 계시던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두 아들을 데리고

귀국한 후,  기족을 그리워하는 많은 그림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큰 기대를

가지고 개최하였던 전시회가 경제적으로는 큰 실패로 끝났다. 마침내 그는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중섭의 생애와 부부의 활동은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큐레이터가

 '21년 11월 20일 조선일보에 게재한 살롱 드 경성에 자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