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나에게는 게이(gay) 친구들이 많다. 숫자적으로 많다기 보다는 비례적으로 많다는 얘기다. 일부러 찾아 다닌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그 중엔 처음부터
게이인 줄 알았던 사람도 있고, 모르고 친해진 친구들도 있다. 그런 친구들 중엔
아직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 벌써 오래전에 내 곁을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떠난 사람들 중 챨스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챨스는 내가 에이즈 병동에서 일 할때 환자와 간호원의 관계이상으로 친구처럼 친해졌던 내 환자들 중에 하나였다.
일하는 도중에 조금이라도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환자들의 병실에 찾아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발가벗겨져,
무기력과 외로움에 한없이 작아져 버린 몸과 마음을,
따뜻한 손길과 대화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해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를 썼었다.
나 뿐이 아니라 같은 병동에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었다. 필요할 땐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도 서슴치 않았었다. 그래서인지 환자들과 친구이상으로 친해지고 그 가족들과도 특별한 유대관계를 갖게 되었었다. 우리는 하나의 대가족이었다. 일년에 300명이 넘는 생명을,
죽음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힘 없이 가느다란 생명의 줄을 놓아 주어야만 했을때, 우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아무도 안 보는데서 눈물을 훔치고 나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또 다른 환자들을 돌봐야 했었고 그럴때 마다 우리가 얼마나 작게 느껴졌었는지....
챨스는 연극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시카고에서 유명한 무대 감독이자 연출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말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또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한 종교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러가지 종교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어느 한 종교에 대해서 편견은 갖고 있지도
않았으며 어느 하나를 비판하는 일도 없었다. 단지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거의 모든 환자들이 중증이어서 집에 가 있는 시간보다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형편들이라 우린 그들을 frequent flyer (단골손님) 이라 부르며 어떤땐 퇴원한지 일 주일도 안 돼서 앰블런스에 실려 되돌아 오는 환자들을 마치 귀한 손님 맞듯이 반겨주곤 했었다.
또한 나의 단골 환자인 경우 거의 예외없이 내가 다시 간호할 수 있게 환자를 배당할 때도 배려를 했었다.
난 그때 오후 근무를 했었다.
근무교대 시간에 오전 근무 팀으로 부터 리포트를
받을 때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챨스가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하고 DNR(Do Not Resuscitate-만약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응급처치를 하지 말 것)에 서명을 하고 양로원으로 가 조용히 죽음의 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 않는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그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희망이 없는 날들, 약에 의존한 단순한 생명의 연장., 그는 그걸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상당히 울적해 있을꺼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기분을 좀 돋궈 줄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며 그의 병실을 향해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어느새 챨스의 병실 앞에 까지 오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챨스의 얼굴을 마주 보기가 겁났다. 무슨 말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하이, 죠!"
챨스가 먼저 인사를 해 왔다. 인사에 답하려고 겨우 고개를 돌려 챨스를 쳐다 보았다. 그 순간 내 우려가 한 없이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은 울적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미소까지 머금은 환한 얼굴이었다.
"너 뭐가 잘 못 된 것 아니야?"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내 질문에 챨스는 웃으면서 답했다.
"걱정하지마, 죠. 난 떠날 준비가 다 돼 있어."
"떠나긴 어디로 떠난단 말이야? 아직 양로원에 수속도 다 안 끝났는데."
"아니,
양로원이 아니고 이 세상을 말이야.
사실은 한번도 가 보지 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이 가슴이 설레이기 까지 하는데...
앞으로 가는 곳은 어떤 곳일까?"
약간은 들뜬 목소리와 그의 태도에는 조금도 거짓이 안 보였다. 이럴 땐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어떻게 대화 를 끌어 나가야 자연스러울까?
"챨스, 넌 이생을 믿니? 다음 세상을?"
"그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길 떠난 다음에 어디로 가겠니? 전혀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기대에 난 흥분까지 되는데."
"진짜? 그래? 그럼 나한테 한가지 약속할 수 있니?"
"뭔데?"
"너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저 세상에 가서, 저 쪽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나 한테 알려 줄 수 있어? 나도 참 궁금한데"
"그럼, 약속할 수 있지."
난 그저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장난 삼아 해 본 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진지했다.
"그래? 어떻게 알려 줄건데?"
그는 주저없이 금방 대답을 해왔다.
"New Year's Eve(설날 전 날 밤)에 너에게 키스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바로 나야. 그게 너한테 내가 다른 세상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야."
그 후 며칠 있다가 챨스는 양로원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나서 한 달도 안 돼서 평화롭게 저 세상으로, 그렇게 기대에 부풀어서 기다리던 여행을 떠났다고 양로원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난 챨스에 대한 기억을 화폭에 옮기며 아침을 맞았다.
난 아직도
챨스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섣달 그믐날 밤에 키스로 새해를 맞는 것이 우리의 풍습이 아니라는 걸 알았더라도 그런 약속을 했었을까?
(월간 ‘순수문학’
200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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