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수필

흑염소 보신탕

doggya 2006. 5. 21. 01:21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누구나 쉽게 쓰는 말이지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말을 쓰는데 아주 인색했었다. 아니, 예전엔 이 말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다고 서슴지 않고 비난까지 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진짜로 고생 끝에 낙을 찾는 사람보다는, 끝이 없는 고생 속에서 좌절하며 삶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부정적인 생각을 뒤엎은 일이 최근에 생겼다.

 

  나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다. 그 애의 이름은 영이고, 우린 오래전 식당에서 웨이트레스로 일을 하면서 만난 사이다.

내가 먼저 고참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영이는 한참 후에 들어 온 후배였다. 처음에 새까만 긴 생머리를 질끈 뒤로 동여매고 열심히 일하는 부지런한 영이를 봤을 때, 요즘에 참 보기 드물게 착실한 애구 나하고 좋은 인상을 가졌었다. 그리고 나는 일터의 선배였고, 또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편의상 우리 둘 사이에는 당연히 언니, 동생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우연히 학교에서 만나게 되고,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더 친해지게 됐다.

학교에서는 같은 클래스를 듣는 일도 생겼고 또 매일 일터에서 같이 일하면서 더욱 가까워져, 언니가 없는 영이와 동생이 없는 나는 명칭뿐인 언니, 동생이 아닌 진짜 자매지간과 같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영이에게 남자친구 후보감이 생겼을 땐 우리가 일하던 식당에서 데이트를 하게 하면서 몰래 선도 봐주고, 또 차츰 서로의 개인적인 얘기도 하게 되다보니 자연히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친했으면서도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얘기를 얼마 전에 우연한 기회에 영이로부터 듣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내 생각에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영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미국 오기전 한국에서 받은  뇌수술의 회복이 다 안 된 상태의 엄마와 남동생, 그리고 아버지와 오빠 이렇게 다섯 식구였다. 그런데 오빠는 곧바로 집을 나가 어디론가 가 버렸고, 그날그날 벌어야 하는 힘든 집안 형편에 당연히 가야하는 학교는 영이에게는 엄두도 못내는 사치스런 일 이었다. 별다른 기술이 없는 아버지가 혼자 벌어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영이는 학교대신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용돈을 벌기 위해 하는 파트타임이 아닌, 정식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미국법상 미성년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애를 쓰던 중 다행히도 아버지와 안면이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 일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딸이 나란히 같은 직장에 출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에 적응을 못한 아버지는 3일 만에 해고를 당하고, 결국은 영이 혼자서 집안을 돌보는 처지가 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이 없으면서도 새로운 환경과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삐뚤어지기 일쑤인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얼마 후 아버지조차도 온다 간다 말없이 집을 나가버려 병든 엄마와 동생만 남은 집에서 운명에 등을 떠밀리듯 어쩔 수 없이 가장노릇을 해야만 했었다.

 

   자기 자식들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는 아줌마들 틈에서 하루 종일 헝겊에서 나오는 먼지를 먹으며 앞날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날들을 보내면서도 영이는 항상 마음속에서 자신에게 다짐하는 한 가지 맹세가 있었다. 공장 아줌마들 틈에 끼어서 그렇게 어른이 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학교에 가리라, 그래서 남들처럼 공부도 하고, 영어도 배워서 기회의 나라에서 앞날을 설계해 보리라.

 

   그런데, 얼마 후 그렇게도 바라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장래를 바라볼 수도,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던 봉제공장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용케도 한인 타운에 있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식당에 웨이트레스 자리를 구한 것이었다. 거기서 일하게 되면서 그렇게도 바라던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기쁜 일이었다고 한다. 저녁에는 음식을 나르고 상을 치우고, 낮에는 그렇게 원하던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희망이 보였다.

  늦게 시작한 학교 공부만 해도 따라가기 힘들었을 텐데도, 고달픈 줄 모르고 식당과 학교를 번갈아가며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뛰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도 신문사 공무국이며 패스트푸드식당 점원등,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사실 이민초기에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학교과목을 따라가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평할 시간도 없이 밤을 새워 숙제를 하고, 또 못 다한 공부는 서머스쿨까지 해가며 제 기간 안에 고등학교를 졸업함으로써 선생님들조차도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곤 예전 같으면 태평양 건너 한국 땅보다도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아니 꿈도 못 꿀 것 같았던 대학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자신이 생활비까지 짊어져야하는 형편에서 가고 싶은 대학을 골라 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우선은 돈이 많이 안 드는 커뮤니티 칼리지(2년제 시립대학)를 다니기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그 동안에도 엄마의 병세는 좋아졌다 나빠졌나를 되풀이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면서 재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후에는 정상적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영이의 학교와 생활전선을 오가는 사투는 끝도 없는 것처럼 계속되었다. 그 당시 그렇게 당장 아파트값 내고, 먹고 살고, 학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당면한 문제였던 상황에서도 가장 마음 아팠던 일은 회복기에 있는 엄마한테 그 흔한 보약 한첩 못해드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이는 집 근처의 한인상가에 흑염소에 약재를 넣어서 고아주는 보양원이 있다는 얘기를 옆집 아주머니에게서 듣고는 귀가 솔깃해 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고 하는 흑염소 보신탕을 한 번만 잡수시면 엄마가 쉽게 기운을 차리실 수 있을 것만 같아 동생과 함께 보양원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꼽아가며 계산을 해 보아도 두 남매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흑염소 보신탕의 값을 당해 낼 수가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하지만 좌절하고 돌아서는 대신, 영이와 동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보양원 사장님한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보신탕 값의 일부분만 지불하고 매달 버는 돈에서 조금씩 몇 달에 걸쳐서 갚으면 안 되겠냐고.

 

 사정이야기를 들은 사장님은 두 남매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직까지 이 두 아이들과 같은 애들은 보지를 못했다고 하며, 흔쾌히 허락을 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엄마는 그걸 잡숫고 기운을 차리시게 되고, 약값은 몇 달을 웨이트레스를 하며 번 돈에서 조금씩 떼어서 갚아 나갔다.

 

   그 후, 좀 더 나은 수입을 위해 내가 일하고 있던 일본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어 영이와 나의 오랜 인연이 시작되게 된 것이었다. 열심히 일하며, 커뮤니티 칼리지를 끝내고 4년제 대학으로 옮겨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직장을 가지면서, 생활의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는 생명을 위협하는 몇 번의 재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이 있었지만, 이미 강인해져 있는 두 남매에게는 세상에 두려운 게 하나도 없었다.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 바로 장래를 약속하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래스 메이트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커리어 우먼으로써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첫 아이가 생기고 난후에 아이에 대한 투자가 인생에서 가장 큰 투자라고 생각하고, 탄탄대로를 걷던 직장을 미련 없이 버리고 풀타임 엄마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커가면서 조금씩 여가시간이 생기자, 영이와 나는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하다가 우연히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예전에 영이 남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흑염소 보양원 사장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잊고 싶었던 지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어렵고 힘들었던 영이의 지나간 일을 뒤 늦게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항상 위로의 말만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 험난했던 과거위에 피와 땀 그리고 좌절하지 않는 굳은 의지와 희망으로 쌓아올린 현재에서, 작은 것에도 항상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영이가 자랑스러워 포근히 안아주고 싶었다.

 

 (2005성주문화 창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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