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가만히 두자

doggya 2010. 5. 3. 14:14

 

 

가만히

          두자

 

 

 

 녹말가루를 물에 풀었다가 한동안 놓아두면, 가루는 모두

밑바닥에 가라앉고 다시 맑은 물이 위로 떠 있는 것을 보게 됩

니다.

    가끔 너무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나를 가만히 내버

려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지난 녹말물처럼 온갖

상념이 다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

까 싶어서요.

 

 한 교육자는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한가한 시간을 견디는 힘' 이라고.

    한가한 시간, 가만히 있어보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 성장

기에 꼭 필요하다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부모들은 아

이들을 한 시간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공부해라, 학원

가라, 책 읽어라, 운동해라, 피아노 쳐라······.

    한순간도 가만히 있을 여유가 없는 아이들은 책상 앞에 앉

아서 사시나무처럼 다리를 떨거나 컴퓨터 게임기의 버튼을 미

친 듯이 눌러대야 마음이 오히려 안정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가장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가, 아이들이, 세상이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고요한 호수처럼 쉴 시간이 필요하지만 세상은 무거운 짐

을 진 가장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회사에 가면 정신없이

일해야 하고, 차와 사람들이 홍수를 이루는 출퇴근길을 헤치고

다녀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왜 당신은 말이 없냐.' 고 싫은 소

리를 하는 아내에게 시달려야 하고, 아이들은 아빠랑 무언가

하고 싶다 요구하고······.주부들은 주부들대로 정말 딱 하루만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봤으면 좋겠다고 이야

기합니다.

    누구나 소설 《좀머 씨 이야기》 속의 좀머 씨처럼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둬!' 하고 외치고 싶은 순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처에도 그렇고, 삶에도 그렇고,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에

게도 그렇고,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에게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

람에게도 그렇고, 나 스스로에게도 그렇습니다. 모두에게는 가

만히 내버려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빈집처럼, 아물기를 기다

리는 상처처럼, 녹말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이른 새벽처럼······.

 

 

출처 : 나를 격려하는 하루 (김미라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