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1993년 10월 9일. 추석 연휴가
막 끝난 가을날 새벽이었다. 눈 비비며 일어난 여섯 살짜리 아들과 다
섯 살 난 딸애에게 남편은 동전을 두 손 가득 쥐어주었다. 전날 상가
에서 화투를 쳐서 땄다는 것이었다.
"아빠 갔다 올게."
남편은 출근을 했다가 사람들과 함께 바다 낚시를 떠난다고 했다.
우리는 승용차 꽁무니가 골목길을 벗어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다
보았다. 운전석에서 잠깐 뒤를 돌아 손을 흔들어주던 남편의 모
습······.우리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
라도 했던 것일까.
다음날, 서울의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했다. 딸애를 데리고 시
장에 다녀오는데, 좌석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었다. 서해에서
배가 침몰했는데, 그 배에 낚시꾼이 무척 많았다는 소식이었다.
'큰 사고가 났구나. 정말 안됐다.'
그런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게 나의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한 채.
날이 저물어 밤 10시가 되고, 또 12시가 넘어도 낚시 갔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 한 통 없었다. 설마 설마 하며 이곳저곳 전화
를 해봤지만, "기다려보라"는 말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새벽 2시, 애들 고모부 차를 타고 그곳으로 출발했다. 군산을 지나
격포항에 도착한 건 어스름한 새벽녘.
'아무 일 없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스스로를 달래며 그곳에 도착하니, 격포항 주차장에 낯익은 회색 승
용차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설마'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차
안에는 남편이 전날 아침 출근할 때 입었던 새 양복이 걸려 있었다.
모든 기대가 무너져버렸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
렸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다시 기절하고, 또 다시 깨어나서 엉엉 울
고······.
남편은 그렇게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겨우 서른다섯의 나
이에.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처음에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
랐다. 친척들이 영안실에 몰려들자 반갑다고 뛰어놀기만 했다. 그러다
가 이제 다시는 아빠를 만나지 못한다는 비정한 현실을 깨닫는 순간,
울음보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엄마, 이제 아빠 못 보는 거야? 거짓말이지? 응" 거짓말이지?"
나는 품안으로 파고들며 눈물을 쏟아내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남편은 차가운 땅속에 묻어두고 차마 뗄 수 없던 발걸음을 돌려 집
으로 돌아왔다. 이제 세 식구가 남았다. 여섯 살 난 아들과 다섯 살짜
리 딸애, 그리고 서른두 살의 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울면
서 그 가을을 보냈고, 겨울날도 그렇게 넘겼다.
어느 날 딸애가 귤을 먹다가 말했다.
"엄마, 이거 썩었어."
그러면서 그 귤이 어디에서 났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애들 삼촌
이 사주고 갔나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동네 아저씨가 "불쌍하
다"면서 1,000원을 주기에, 귤이 먹고 싶어 샀다고 했다. 그런데 과일
가게 아주머니가 한 개 더 준 귤이 썩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도 챙겨주지 않고 그저 울면서 보냈는데,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이제 저 아이들은 온전히 내 몫인데.'
어린것이 얼마나 귤이 먹고 싶었으면, 혼자 가서 과자도 아닌 과일
을 사 왔을까.
남편과 아이들은 귤을 무척 좋아했다. 겨울에 귤 한 상자를 사면, 사
흘이면 셋이서 몽땅 먹어 치웠으니까.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집 밖으로 나왔다. 귤 한 상자를
사서 들어가니 아이들이 기뻐하며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걸 지켜보
는 내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봄이 오고,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아빠 없는 빈
자리가 너무도 허전했다. 아이들을 놀이공원에 데리고 가도 전혀 즐겁
지 않았다.
딸애는 가끔 친구들과 놀다가 멍해질 때가 있었다. 다른 친구 아빠
가 데리러 올 때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딸애의 그
런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큰애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 맞은편 베란다 너머 온 식구가 둘러앉
아 저녁 식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혼자 훌쩍훌쩍 울고는
했다.
"엄마, 애들이 자꾸 놀려. 우리도 아빠 하나 만들어. 응? 엄마가 아
빠 하나만 만들어줘."
결국, 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래 더 이상 울지 말자. 다른 가족들 보면서 부러워하지 말자.'
아이들과 나를 위해 재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지금의 남
편을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아들 녀석은 그날 지금의 남편을 화장실
까지 쫓아다녔다. 아빠의 정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리고 새 가정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잘 따라주었고, 남편
역시 아이들에게 잘해주었다. 당연히 '새 아빠니, 친자식이니', 그런
것들을 잊고 살게 되었다. 큰 녀석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아
빠야" 하면서 자랑을 하기도 했다.
음력 8월 24일은 먼저 간 남편의 기일이다. 지금의 남편은 여태까
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눈물나게 고맙고, 미안하
기도 하다. 내가 눈물을 글썽거릴 때마다 그는 담백하게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거
야. 그리고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일 뿐인데 뭘."
300명의 목숨을 삼켰던 바다······.근 한 달 동안이나 신문이나 TV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해 페리 호 침몰······.그때 여섯 살이던 큰애가 지
금은 중학교 1학년이고, 작은애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그렇게
흘러온 세월만큼 페리 호 사건은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하지만 나는
매년 그날이 오면, 서해 페리 호와 함께 운명을 달리한 300명의 영혼
을 위해 빌고 또 빈다.
그날이면 나는 술 한 잔 부어놓고 먼저 떠난 그에게 속삭인다.
'아이들 잘 키울게요. 큰애는 벌써 저보다 큰 걸요. 걱정하지 마세
요. 저 세상에서나마 재미있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재혼해서 정말 미안해요.'
출처 : 함께 해서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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