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아픔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현관 가득 울려 퍼지는데, 아이는 벌써 저만치
달려가 있다. 베란다 창문으로 얼른 달려가, 뒷모습만 희미하게 보이
는 아들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린다. 가슴 한편에서 울컥 눈물이 솟아나며,
이제는 세월의 이끼 속에 희미해져 가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도 자식 낳아봐.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어미란 것은······.자기
배고프고 자기 몸 아프고 말지. 자식이 아프고 힘들면 그 꼴은 차마
못 보는 거야. 너희도 나중에 어미 되고 아비 되면 그 맘 알 거다."
"피~, 엄마는 매일 그 소리. 우리가 아프면 아프지, 왜 아버지 엄
마가 아프다고 그래!"
어릴 적 나는 병을 달고 살았다. 배탈이 자주 났고 습관성 빈혈까지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전체 조회가 있는 날이면 여름날 호박꽃처럼
흐드득 땅바닥에 곤두박질하곤 했다. 그런 내 머리맡에 앉아 어머니는
항상 그런 말씀을 하곤 하셨다.
'그때 내 어머니도 이렇게 답답하고, 이렇게 가슴이 아팠겠구나.'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제서야 내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내 아들놈 덕분에.
아들은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다. 병원과 집을 오가며 힘든 생활을
해야 했던 내 아이. 이 아이 나이 다섯 살 되던 해, 편도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으로 정밀 검사와
수술을 할 때, 내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의사 선생님이 "머리 속에 물이 고이는 병일 수도 있다"면서 자기
공명 사진을 찍자고 했을 때는 더 이상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그 이
후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잔가지처럼 불쑥불쑥 돋아나는 병치레. 그래
도 허위허위 이제 열두 살이 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생각하는 수준이 어른 뺨 칠 만큼 기특한 녀석이다.
남편과 나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면서 조바심에 애태우면서도 한편으
로는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이에게 다시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두 손을 쥘 수도, 반듯하게 펼 수도 없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병.
머리 단층 촬영을 해보았지만 소아과 소견으로는 머리에 이상이 없다
고 했다. 그러니 다시 재활의학과로 가보라고만 했다. 피를 뽑고 엑스
레이를 찍었다. 핵 의학실에서 전신 뼈 사진도 찍었다.
우리 부부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잤다. 이제 몇 가지 검사와 그 결과
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는 병원에 다녀오자마자 학원 가방
을 걸머지고 냅다 달려나간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울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내가 약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일부러 명랑한 척하는 아이를 더 마
음 아프게 할 것 같아 병원에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며칠 전 병원에 다녀온 날, 아이의 일기장을 보았다. 그날 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천방지축 철부
지일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
일기장에는 "엄마 아빠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스럽다"고 씌어 있
었다. "나도 두렵고 그래서 울고 싶을 때도 있다"고 연필을 꾹꾹 놀
러 써놓기도 했다. 아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일기장 곳곳에 눈물 자국
이 번져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아이는 어느 정도 자신의 처지
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걸 보는 내 가슴은 미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 놓인 일기장에 이렇게 편지를 썼다.
우리 희망을 잃지 말자. 그리고 미안해하지도 말자. 우리는 널 사랑해
너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결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이가 그 편지를 본 것 같았다.
오늘은 아이의 뻣뻣해져가는 손을 잡고 병원에 다녀왔다. 큰 기계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누운 녀석의 눈에선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에 수천 번, 수만 번 송곳이 박히는 것 같았다. 아이이 그런 모습
을 보자 또다시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너도 어미 되어봐라. 차라리 내 몸뚱이가 아프고 말지, 새끼 아픈
꼴은 차마 못 본다."
공부 안 한다고, 느려 터졌다고 곧잘 윽박지르던 성미 급한 나였기
에, 기계 속에 누워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열두 살 난 아이에게 더욱
더 미안했다.
'정말로 아픈 자식 바라보는 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구나.'
그러나 나는 엄마다. 내 어머니처럼, 내 핏줄 물고 세상에 태어난
자식을 기르는 엄마다. 어떤 결과, 어떤 장애로 힘들어질지는 모르
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의사 선생님의 짐작대로 마비
증상이 진행되는 고통이 온다 해도, 나는 내 아이가 이 세상과 작별하
는 날까지 아이 곁에서 엄마가 되어주련다.
내게 엄마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어준 아이, 세월 속에서 또렷하게
전해지는 어머니의 사랑을 늘 기억하게 해준 아이, 천신만고의 고통
끝에 품에 안게 된 아이가 바로 이 아이였다. 그러니 부디 신께서 아
이에게 치유할 수 있을 만큼의 아픔만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내 아이, 내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나 또한 존재
하리라. 그 애의 손과 발이 되어, 그 양분이 되어 진정한 엄마로 거듭
나리라.
아들아! 내 아들아! 우리 좌절하지 말자. 울지도 말고 기죽지도 말
자. 그리고 똑바로 앞을 보자. 너는 엄마의 손을 잡고, 나는 네 손을
잡고 함께 달려가자꾸나.
우리에게 좌절은 없단다. 사랑한다. 아들아!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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