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구조요원, 나의 아주머니
"내가 집주인이라고 위세라도 부
렸나? 살림 펼 때까지 있어도 된다는데 그러네. 그렇게 자꾸 간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언제라도 오고 싶으면 아무 생각 말고 다시 와.
항상 이 방 비워놓고 있을 테니까."
나는 주인이 "나가라! 어서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시원찮을 세
입자였다. 그런데도 집주인 아주머니는 떠나는 날까지 따뜻한 점심상
을 차려주시고 등을 다독거려주셨다.
"어디를 가든지 당장 먹을 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
그러면서 쌀 한 포대와 김치 한 통까지 이삿짐 차에 올려주셨다. 나
는 눈물이 찔끔 났다. 게다가 차에 오르는데 내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
은 봉투를 찔러주신다. 한사코 사양하다가 그냥 받았다.
"아······아······아주머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감······감
사······."
나중에 봉투를 열어보고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월세
방 보증금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게 아닌가. 방세를 못 드린 게 무려
1년하고도 2개월이었다. 보증금을 다 털어도 월세에 턱없이 못 미치
건만, 아주머니는 그 돈을 그대로 돌려주신 거였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은 3년 전이었고, 아주머니와
의 인연은 그때 시작되었다.
남편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우리 가족은 짐을 꾸려 경기도 광
주의 아주머니 댁으로 이사를 했다. 실패에 만신창이가 된 우리 다섯
식구······.아주머니는 이것저것 따져 묻지도 않고 우리를 선뜻 받아
주셨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두 다리를 쭉 펴고
편히 쉴 수 있었다.
남편은 그 집에서 얼마 동안 쉰 뒤 "다시 일어서보겠다"면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희망이 보이는 나날이 이어졌다. 사업에 실패한 그는 번듯
한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정수기 외판원
에 보험설계사, 꿀 장수에 양말 장수까지······.
하지만 남편은 하는 일마다 두세 달을 넘기지 못하고, "에잇! 더는
못해 먹겠다"면서 손을 들어버렸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먹고살 정도
만 생각하면 좋으련만······.나름대로 규모 있게 사업을 해온 남편은
그런 일이 성에 안 차는 모양이었다.
결국,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남편은 희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집을 나가버렸다.
'무책임한 사람!'
아내인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토끼 같은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어떻게 발을 뗄 수 있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투정 한 번 않고 그저 묵묵히 남편만을 믿고 바라
보면서 욕심 없이 살아왔건만······.'
그것이 남편에게는 서슴없이 등을 돌릴 수 있는 빌미가 되었던 것일
까? 하지만 그를 원망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 여유를 부릴 틈조차도
내게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빈자리······.나는 덜컥 겁이 났다. 어린 자식들
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눈앞에 깜깜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세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마주하기가 겁이 났다.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세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버리고 싶다는 못난 생각만
자꾸 들었다.
이럴 때 나와 가족들 지켜준 분이 집주인 아주머니였다.
"이봐. 이리 좀 와봐. 그렇게 방구석에서 울기만 하면 세상일이 저
절로 된대?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는 거라고."
아주머니는 강제로 내 손을 잡아끌어 밖으로 내몰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땀 흘리는 노동을 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상
추를 뜯고, 부추를 베고, 포도에 봉지를 씌우고, 고추 모종을 내고, 김
을 매고······.그렇게 비지땀을 흘리면서 노동의 참 맛을 느낄 수 있
었다. 힘은 들었지만, 그런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을 가진 것
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이제 돈 되는 일이라면 앞뒤 잴 것도 없이 뛰어다녔다. 일이 서툴다
고 다른 사람들 절반 값의 품삯을 받아도 행복했다.
'그래! 내 힘으로 우리 집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있어.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런 뿌듯함에 힘든 줄도 몰랐다. 밤이면 정신없이 곯아떨어져서 사
라진 남편을 원망할 틈도 없었다. 잡념이 생길 시간마저 없어지니 그
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 사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것일까.
하루하루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일거리가 꾸
준해서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 학비까지 나가다
보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한 달, 두 달 방세가 밀리기 시작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지. 방세가 뭐가 중요
해."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드릴 때마다 아주머니는 이렇게 내 입을 막았다.
그때는 연탄 살 돈도 없었다. 그래서 차디찬 방에서 네 식구가 이불
을 뒤집어쓰고 떨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아주머니
는 우리 모습을 보시더니 눈물을 쏟으면서 나를 원망했다.
"에그, 이 사람아. 자네야 어쩐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토끼 같은 애
들을 떨게 만들어? 이런 지경이면 나한테 얘기를 하지. 자존심, 그 까
짓 게 그렇게 중요해?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아주머니는 사람을 불러 연탄을 들여다 주셨다. 온갖 푸성귀에 쌀,
갖은 양념, 김치까지 사흘이 멀다 하고 퍼 날라주셨다.
만일 아주머니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우리 식구는 그해 겨울, 그
방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주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
리에게 그렇게 넓은 사랑을 베푸셨다.
"이 사람아, 사람 살아가는데 정만큼 살가운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우리는 아주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은 폐를 끼칠 수 없다고 모진 결심을 했던 것이다. 우리만 아
니면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분인데,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켜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주머니는 우리 걱정 때문인지, 갑
자기 늙으신 것 같았다. 이제는 우리에게서 벗어나게 해드려야 할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떠나왔다. 그러나 아주머니가 베풀어주신 그 크
나큰 사랑은 눈을 감는 날까지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아주머니를 생각하면서 결심해 본다.
'아주머니의 사랑이 헛되지 않게 저, 열심히 그리고 보란 듯이 잘살
거예요. 아주머니, 훗날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찾아갈게요. 그리
고 저 취직도 했어요.'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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