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김인호>“국가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나라가 존망 갈림길”

 
 
기사입력2019.11.13. 오전 11:11
최종수정2019.11.13. 오전 11:20
원본보기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한국경제와 함께 50년의 세월을 담은 회고록을 낸 후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인근 공원 벤치에 앉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갖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김 전 수석은 “직접 보고 겪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이 현대 한국 경제사를 정리하는 데 나름대로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 김인호 前 청와대 경제수석

“시장으로 귀환하는 정책 없이는 한국경제 미래도 없다”

기업 역할 부정… 국가가 중심

탈원전 이어 소득주도성장까지

사회주의적 정부가 아니고서는

이런 정책을 추진할 수가 없어

전문성 없고 공부도 안된 이들

무면허자가 음주운전하는 형국

규칙 준수 소리쳐도 의미 없어

반환점 돌아도 바뀌지 않을 것

공직생활서 물가정책 등 시행

현장과 괴리 느끼며 갈등커져

자연스레 ‘시장주의자’ 되더라

시장의 역할 무시한 경제체제

동서고금 통틀어도 성공 없어

외환위기, 시스템 문제였는데

발생원인·배경 정밀분석 미흡

유사사태 재발땐 또 당할수도

소비자 선택권의 보장 정도가

시장경제 체제 판가름의 척도

공급자가 좌지우지해선 안돼


지난 2017년 11월 한국무역협회장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김인호(77·현 재단법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두툼한 노작(勞作)을 들고 나타났다. 직접 타이핑까지 하며 1년 반 이상 공을 들인 회고록, ‘명(明)과 암(暗) 50년-한국경제와 함께’1·2권(기파랑)이다. 1권의 부제는 ‘영원한 시장주의자’로 730쪽, 별권(別卷)인 2권은 ‘외환위기의 중심에 서다’로 213쪽이다. 묶어 943쪽에 달하는 자못 방대한 분량이다. 200자 원고지 3000장이다.

제목이 보여주고 있지만, 내용을 조금만 살펴도 시정(市井)의 회고록과는 달라 보인다. 1967년 1월 행정고시 4회에 합격해 경제부처에 사무관으로 몸담은 후 공공과 민간에서 50년을 보낸 정통 직업 경제 관료의 드문 궤적이다. 한국 경제사,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회고록은 전체 등장 인물만 해도 거의 800명에 이른다. 서문에서 자신도 “50여 년 개인의 삶의 기록인 동시에 그 중심에 있었던 같은 기간의 한국경제 현대사의 일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과정에서 환란 주범이란 낙인(烙印)까지 찍혔다가 무죄 판정을 받은, 경제 관료의 뼈를 깎는 술회라는 ‘희소가치’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경제의 어제를 담은 작은 블랙박스이자 오늘을 짚어보고 내일을 유추할 단초이기도 한 셈이다. 문화일보가 회고록 저자에게 다소 이례적으로 인터뷰를 요청한 배경이기도 하다.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쓴 회고록 ‘明과 暗 50년-한국경제와 함께’.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시장경제연구원에서 김 이사장을 만났다. 인터뷰 내내 김 이사장의 표정은 지나온 삶의 자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인지 홀가분해 보였다. 그랬다가 현실 정치와 경제 현상을 얘기할 때면 답답함도 교차했다. 정책과 사고, 가치체계의 충돌과 그로 인한 번민, 갈등의 뒷얘기를 회상할 땐 약간 목소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환란을 둘러싼 재판을 상기하는 대목에선 “나는 1심부터 100% 무죄였다”고 결기를 실어 힘주어 말했다.

―회고록은 분량도 많지만, 꼼꼼한 기록, 사진이 눈에 띕니다. 평소 기록을 계속해 왔는데,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회고록을 시작하기 전에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내 일생이 담긴 사진을 데이터베이스(DB)화했는데 1만5000장 정도 됐습니다. 개인의 일생을 이처럼 사진으로 정리한 사례가 없다고 해요. 제가 독창적으로 시도한 겁니다. 그런데 회고록을 쓰면서 이 사진이 정확한 기억을 되살리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사진, 기억 그리고 자료와 함께 포털의 언론기사 DB가 선명하게 과거의 기억을 복원해 줬습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개인 웹사이트(www.ihkim.org)를 운영해 왔습니다. 물론 이 웹사이트 역시 도움이 된 건 두말할 나위 없고요. 대한민국에서 학자, 정치인이 아닌 관료 출신으로 개인 홈페이지를 가진 이는 저밖에 없을 겁니다. 특히 동아시아 외환위기에 관한 자료는 별도의 외환위기 메뉴를 꾸려서 세계 최고 수준의 DB를 구축해 놨습니다. 제가 겪은 외환위기 책임규명 재판과 관련해 1심 27번, 2심 9번에 걸친 기록도 모두 수록돼 있어요.”

―회고록이 기록 문화의 발전에 일조하길 바란다고 밝힌 연유로도 읽힙니다.

“정치인이나 학자가 아닌 순수 직업 관료 출신이 이런 성격의 기록을 책으로 남긴 경우가 드물어요.”

―스스로 생각하는 다른 회고록과의 차별성은 뭔가요.

“사람에 관한 얘기를 피하지 않고 모두 담았어요. 지금까지 많은 이가 회고록을 내놓았지만, 거의 안 읽지요. 왜냐하면 민감한 사안이나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다 빼버리니까요. 주요 사안, 진실이 제대로 설명이 안 되지요. 진실의 뒷받침이 없으면 역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죠. 좋은 것만 쓰려면 애당초 이 책을 써야 할 이유도 없었고요. 이번에 회고록을 보고 좋아하는 이도, 불쾌한 이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 사람에 대한 저의 기술은 해당 사안이나 저와 직접 관련된 범위 안에서만 썼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온전한 평가나, 전인적인 모습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회고록에 등장인물이 많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누굽니까.

“한국 최고의 인재 풀이 모이는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상사, 선배, 동료, 후배 공직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영향을 준 이를 꼽으라면 공직을 막 시작했을 때 존경심을 갖게 해준 선배 공무원인 고 송병순(1929~2012) 씨를 말하고 싶습니다. 비고시 출신의 사무관일 때 만났는데 세관에서 밀수단속부터 시작해서 수입상품 감정업무에 종사해 상품에 대해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한국에서 최초로 ‘상품학’이란 학문체계를 만들었고 독보적인 전문가가 됐습니다. ‘사람이 노력하면 저렇게 전문가가 될 수 있구나’란 점을 일깨워 줬죠.”

김 이사장은 자신의 공직생활이 평탄하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만난 이들 중에는 탁월한 이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족탈불급(足脫不及·맨 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함)’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고 겸양해했다. 회고록에는 공인생활 50년 동안 겪은 사건, 사안 중 한국경제 발전 과정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일을 30개 추려 정리했다. 독과점 품목과 석유화학제품 가격조정, 물가정책 추진, 토지공개념 3법 입법 성사, 금융실명제 추진 좌절과 좌천, 남북총리회담 실무회담 수석대표 활동, 철도청장 재임, 금융개혁안 입안 및 반발, 왜곡과 좌절, 외환위기 대응책 마련 등이다.

―이 중에서도 국가와 국민,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한두 개를 꼽으신다면요.

“물가정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소비자보호원을 설립하고 약관심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선진적인 소비자보호제도의 초석을 쌓은 일이죠. 저와 그리고 같이 일했던 유능한 신철식 사무관 등 실무자들과 추진해서 성사시켰죠. 장차관도 추진하기를 망설이던 일이었고 일개 국장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장기적 발전과 시장경제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책방향이라고 판단했어요. 나중에 일본이 벤치마킹을 하며 배울 정도였습니다.”

김 이사장은 소비자보호제도와 함께 또 하나 1994년부터 2년간 철도청장으로 재직하면서 추진한 정책을 공직에서 두 번째로 보람 있는 일로 꼽았다. 100년 역사의 국유철도에 고객 중심경영을 도입해 정착시킨 것과 철도안전 확보에 더해, 철도의 상하 분리를 근간으로 하는 국유철도 운영개선을 위한 입법(1996년 1월 시행 ‘국유철도의 운영에 관한 특례법’) 성사다. 그는 “그때 철도의 경영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철도서비스는 불가능했다”며 “철도청이란 공기업을 경영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특례법이 만들어졌고 그래서 한국 철도의 중흥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철도 역사 100년에 철도 발전을 위해 이보다 더 큰일은 없었다고 자부했다. 추후 강봉균 정보통신부 장관은 이를 모델 삼아 우정사업본부를 설립했다고 덧붙였다.

―공직에서 30년, 민간에서 또 20년을 일했습니다. 민간부문에서는 어떤 장면이 떠오릅니까.

“무역협회장으로 있을 때 국정감사의 증인출석을 거부했다고 검찰에 고발됐어요. 바쁘기 그지없는 기업하는 사람을 국정감사장에 마구잡이로 부르면 되겠습니까. 제가 증인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일로 부르기에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동행명령장이 발부되고 국회 모독죄로 검찰에 고발됐어요. 저는 검찰이 기소하면 즉시 헌재에 제소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국회가 동행명령장으로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헌법의 명백한 위반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검찰이 불기소했고 국회도 항고를 포기했어요. 사실 크게 다뤄지지 않아서 그렇지 대단한 사건이었어요. 민간에서의 활동 중 건설적인 방향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아무래도 현재 하고 있는 이 시장경제연구원을 창립하고 지금까지 이끌어 온 것이겠죠.”

본인은 마뜩잖겠지만, 외환위기 책임 규명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환란 주범이란 멍에를 벗었다. 감사원 특별감사를 받았고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1999년 8월 1심 판결, 2002년 10월 항소심은 그에게 외환위기에 관한 일체의 법률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2004년 5월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2005년 5월 서울고법 형사 3부는 형사보상 결정을 내렸다. 7년 이상 걸친 사법절차가 마무리된 것. 그렇지만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간난신고(艱難辛苦)였음은 분명할 터다.

원본보기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한국경제는 경쟁력의 유지, 발전 없이 성장과 분배, 복지를 기대할 수 없으며 경쟁력은 오직 경쟁적 구조에서만 나온다”고 역설했다. 김 전 수석 뒤편으로 그의 시장경제관을 집약한 ‘시장으로의 귀환’ 액자가 걸려 있다. 김호웅 기자


―외환위기는 왜 발생했습니까. 남미에서나 쓰던 정책을 잘못 쓰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고 과거에도 지적했는데요.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이고 위기는 필연이었습니다. 개인에게나 한국경제에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IMF에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시장이 더 불안해졌잖아요. 통상 다른 나라들을 보면 한 달 내 안정됐는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외환시장은 더 불안하고 환율은 더 뛰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기업 도산, 대규모 실업 발생 등도 외환위기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외환위기가 경제 전반의 위기로 비화하고 발전한 것이지요. 이는 우리의 재정이 지극히 건전했는데도 불구, IMF가 재정이 위기를 초래한 남미 국가에나 적용하던 처방인 초긴축재정, 초고금리 정책을 강요했고 이를 받아들인 결과예요. 이로 인해 상당수 건전한 기업과 가계조차 파산에 몰려 버렸습니다. 달러가 부족해서 닥친 위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위기가 왔기 때문에 달러가 빠져나간 것이고 위기는 우리 경제에 대한 국제금융계의 신뢰가 떨어진 데서 비롯된 겁니다. 이것이 외환위기의 본질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라고 소제목을 붙여서 외환위기와 관련된 이들 12명(그룹 포함, 당시 직책)을 거론하고 평가를 했던데요.(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강경식 부총리, 김용태 비서실장, 김태정 검찰총장, 임창열 부총리, 윤진식 비서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홍재형 전 부총리, 한국은행 사람들, 김광일 전 대통령 특보, 헌신적인 변호인단이다). 일부에 대해서는 ‘수위’가 약간 높은 것 같기도 하던데요.

“오로지 저의 기억과 양심에 따른 진실대로 기록했을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이가 많았는데 검찰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상황에서 증언했을 것으로 추측되거나 일부 본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경우도 있다고 생각해요. 또 아직도 이해 안 되는 미스터리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텐데 말이죠.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고 당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다 잊어버리자고 할 수도 있는데…끝까지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고요.”

―20년이 흘렀지만, 외환위기에서 저희가 얻고 깨우쳐야 할 교훈,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외환위기를 초래한 것을 사람의 문제로만 접근했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문제였습니다. 쉽게 말해 전 국민의 잘못이었죠. YS, DJ 등 대통령부터 정치인, 금융인, 기업인, 관료, 노동자, 노동조합, 언론 모두 잘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또 외환위기가 유동성 위기에서 출발해 경제 전반의 위기로 증폭된 과정에는 정밀한 분석을 요구하는 많은 요인이 국내외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와 강경식 전 부총리를 일찍부터 환란 주범으로 지목하고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했습니다. 균형 잡힌 규명 노력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이죠. 나도 책임이 없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위공직자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형사책임의 영역이 아닌 도덕적, 정치적 책임이죠. 제가 더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외환위기의 발생과 원인, 배경을 정밀하게 분석해 되돌아봐야 유사사태가 왔을 때 대응할 텐데 그런 노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김 이사장은 스스로 ‘한국의 대표적인 시장주의자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한 시장기능의 신봉자다. ‘선진국이 되려면 선진국 줄에 서야 한다’ ‘소비자가 선택하는 경제’ ‘경쟁이 꽃피는 경제’ ‘시장으로의 귀환’ ‘기업가형 국가의 정립’ 등의 표어는 그가 직접 작명하고 구상한 것으로 그의 경제관을 집약한 것들이다. 불도저 같던 국가주도 경제정책이 집행되던 시기에 고위관료가 된 그가 어떻게 남들보다 훨씬 빠르고 철저하게 시장주의자가 됐을까. 김 이사장은 “나의 한국경제관은 경쟁적 구조, 소비자주의, 국제화”라며 “공직생활 동안 물가정책, 가격정책의 입안과 시행과정에서 시장 경제적 관점으로 봤을 때 이상적인 가격 결정 과정과 크게 괴리된 것을 보며 갈등과 고민이 컸다”고 돌이켰다. 단순히 책 몇 권을 읽고 깨우친 게 아니라, 오랜 실무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장주의자로 자각하고 성숙하는 과정을 밟게 됐고 경제정책의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더 확신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저성장 고착화 위험 속에 정부 경제정책 실정 논란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말하려면 끝이 없겠죠. 탈원전, 4대강 보 해체, 소득주도성장, 과격한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제, 최근 교육정책 논란까지…. 그런데 ‘개별 사안’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정권의 성격이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에서 충격적이죠. 출범 초기엔 나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사회주의적(的) 정부’가 아니고서는 이런 정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국정운영은 장난이나 연습이 아닙니다. 전문성도 없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이들이 개인의 자유와 가치, 시장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눈곱만한 고민도 없이 일방통행을 하고 있어요.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시장을 무시하고 운영한 경제체제로 성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임기 반환점을 돌았는데 바뀔 수 있을까요.

“난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고 봐요. 내 생각이 틀리면 좋겠지만. 무면허 운전자가 만취 상태로 운전대를 잡고 좌충우돌 달리는 형국인데 왜 교통규칙 안 지키냐, 왜 경제속도 준수하지 않느냐, 왜 우회전, 좌회전하지 않느냐, 목적지 어디냐 하고 물어봐야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도 한국경제가 희망을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유, 민주, 시장경제와 법치주의 이념을 부정하는 사상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잖아요. 개인의 자유와 책임보다 전체의 평등이 더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와 가치는 제약돼도 좋다는 전체주의 사상, 경제에서 개인의 자유와 창의보다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는 평등주의 사상, 시장의 경제문제 해결 기능과 기업의 긍정적 역할을 부정하고 국가가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국가주의적 경제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면서 존망의 갈림길에 처했습니다. 시장으로 되돌아가는 정책방향의 대전환이 없는 한 희망이 없다고 봅니다.”

오랜 시간 격정적으로 말을 이어가던 김 이사장은 자신의 회고록을 더 많은 이가 읽어 주길 기대한다는 소박한 심정을 내비쳤다. 특히 자신과는 안면이 없는 불특정다수의 현직 후배 공직자가 일독해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공직을 희망하는 이들이 있다면 단순히 안정적인 직업만을 고려해 공시(公試)할 게 아니라 국가, 국민, 정부, 시장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숙고하는 계기로써 자신의 책이 역할을 해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시장이 실종된 시대에 나라 경제를 다루는 경제 분야 공직자들에게 시장으로의 귀환 없이 한국경제의 미래는 없다고 믿는 내 생각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박봉을 받으며 아내와 어렵게 가정을 꾸려 왔지만, 사명감과 보람을 갖고 일했습니다. 처음부터 시장주의자도 아니었어요. 관료와 시장주의가 동행하기 쉽지 않지만 일을 해나가면서 점차 시장주의자로 변모해 갔습니다. 이 과정을 후배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대검찰청 중수부가 별건 수사로 털었는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오히려 허탈해했다는 천생 경제 관료는 시작도 끝도 깔끔했다.

인터뷰 = 이민종 경제산업부 부장 horizon@munhwa.com

[ 문화닷컴 바로가기 | 문화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 | 모바일 웹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문화일보 주요뉴스해당 언론사에서 선정하며 언론사 페이지(아웃링크)로 이동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