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호인7님의 여행

신성일선생 일주기 추모상연 참가기

doggya 2019. 11. 13. 05:10

 

 

                                                  


                                           신성일선생 일주기 추모상연 참가기

                                                                                                Dr. Gold


  지난 11월 2일 신성일선생 일주기를 맞이하여 올드시네 영화크럽에서는 추모영화가 상영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도서관5층 상영관에서 1시반부터 <반금연>이 상연된후 이어서 <별들의 고향>

(최인호 원작)이 상연되었다.

  보통 추모상연을 기획하기가 쉽지 않은데, 록회장님 등의 열성으로 회원들이 상당히 참석하였다.

또한 당시를 기억하고 신선생과 교분이 두터운 영화평론가 김종원선생, 박승배감독님, 여배우님

이화시님, 세분을 모시고 록회장이 대담하여 주었다.

  공연후 돌곶이역 근처 한상식당에서 대담하신 세분을 모시고 회원들이 환담을 나누어 주어서

추모제가 뜻이 깊었다.



  신성일의 자서전으로 중잉일보에 공개된 <<맨발의 청춘>>에 의하면, 처음 신성일은 1959년

신필림에 전속계약으로 입사하여 주연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받는 등, 연락사무 등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영화 담당 기자단 간사격인 동아일보 호현찬 기자가 신성일을 불렀다. 그가 내놓은 것은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의 대본(책)이었다. 그 무렵 엄청난 인기 속에 막을 내린 한운사의 라디오 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를 극동흥업이 영화로 제작하게 된 것이었다. 호 기자에 따르면 20일 뒤 크랭크인 예정인데 감독은 유현목, 여주인공은 이민자로 확정됐다는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최무룡이 유력하지만, 호기자는 신성일이 더 젊고 적격으로 추천한다는 얘기였다.

 ‘아낌없이 주련다’는 6·25의 피난처가 된 부산 바닷가를 배경으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전쟁 미망인과 피난 온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작품이었다. 성공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신필름이 아닌, 극동흥업의 작품이었다. 유 감독은 '61년 ‘오발탄’으로 실력을 크게 인정받은 상태였지만 신인을 지도하며 기용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신상옥 감독은 홍콩 출장 중이었다. 하루 이틀 기다려도 신 감독 소식은 없었다. 호 기자에게서 독촉이

오는데 초초해 죽을 지경이었다. 선배 남궁원에게 물었더니 그는 월급 타서 쓰는 게 편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급한 마음에 신 감독의 부인 최은희를 찾아갔으나 그 날 최은희는 신당동에 자리한 도금봉 집에서 마작을 하고

있었다.  “신 감독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허락해요? 신 감독 올 때까지 기다려요!” 라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신성일과 신필름은 3년 전속계약이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소설 <<데미안>>에서 보듯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결단이 필요하였다.  그는 마침내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여 대중의 호응을 받아 흥행에 성공하고, 대 스타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


  신성일은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므로서 한국영화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그중 470여편에서 주연을 하였다.  하루에 18편 출연한 적도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믄 기록이었다.

이렇게 많은 작품에 출연할 수 있던 다른 원인은 당시는 동시 녹음이 아니어서 많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1966년도에는 햔해 제작된 영화 170여편 가운데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가 89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이 나타난 것은 당시 영화 흥행업자들이 시나리오를 먼저 보고,주연배우를 지정해서 주문하여 이런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입도선매(立稻先賣)식으로 호남, 강원, 부산식으로 각 지역별로 흥행권을 미리 판매하였다. 제작자측에서는 흥행업자들의 주연급 주문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신성일의 상대역 여배우로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이 트리오로 출연하였다.


  또한 이렇게 영화가 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당시 한국에서 주된 오락이 영화 뿐이었고, 관객이1960년대에 10억명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전후 아웃사이더로서 빗나간 청춘에 대한 소설과 연예물이 붐을 타는 시기였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제2차대전후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en)이 부각되고, 미국에서는 beat generation이 출현하였다. 일본에서는 당시 이시하라 신따로 같은 작가가 치외법권적인 이즈러진 청춘에 대한 글을 쓰고, 후에

토쿄도지사(都知事)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일본 연예물의 영향을 받고, 김기덕 감독이 <<맨발의 청춘>>을 제작하였는데 일본작품보다 오히려 우수하였다고 한다.


  객석에서 <<반금련>> 영화 가운데 지금에라도 살리고 싶은 장면이 있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여기에

출연하였던 여배우 이화시선생은 작품이 몇년간 사장되고 짤렸기 때문에 아품이 컸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한다. 본인 입장에서는 <<이어도>>가 더 인상에 남는다고 하였다.  <<반금련>>에 출연할 때는

초연 수준이어서 가타부타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별들의 고향>>은 몇십년전 영화인데도 화면에 집중이 되고, 배경음악으로 들어간 노래가 객석을

사로잡았다. 당시의 영화에서는 노래의 삽입이 인상적으로 관객이 심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