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만들어 낸 이야기

미시간 호수로 지는 해 - 1

doggya 2012. 3. 5. 03:43

미시간 호수에 지는 해라니? 미시간 호수로는 절대로 해가 지지 않는다. 미시간 호수는 시카고의 가장 동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호수 위로 떠오르는 해는 계절 따라 색깔을 바꾸며 밤일에 지친 현정의 피로를 잊게 해주었고, 가슴이 답답할 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그 호수에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미시간 호수로 지는 해를 현정은 본 것이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영준을 쳐다보는 현정의 마음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이, 그 자리가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구멍이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연민의 정은 커녕 그냥 붙잡고 있는 팔을 콱 놓아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쓰러지든지 말든지 그건 현정이 알 바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꼴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지배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아침 약을 먹고 쓰러져 코를 골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는 그냥 깊이 자는 줄 알았다. 그러나 평소보다 더 큰 숨소리가 이상하긴 했지만, 팔자 좋게 꽤 깊이 자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더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해야 할 오늘은 같이 엘에이로 가기로 되어 있었던 날이 아니었는가? 정신없이 자는 영준을 깨워 준비를 시키려고 흔들었을 때  반응이 좀 이상했었다. 간호사라는 현정의 직업의식보다는 그냥 육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무언가 이상했다.

 

"야, 일어나, 비행기 시간에 늦는단 말이야."

눈을 반쯤 떴다가는 도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쓰러져 버렸다.

"너 뭐 먹었어?"

현정은 다그쳐 물었다. 영준이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면서도 조금도 감정의 변화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하기까지 했다.

"어--엉"

"뭐야? 뭐 먹었어?"

"아티반"

"몇 알 먹었어?"

"스무 아아~알.....ㄹ"

치사량은 아니다.

"뭐야? 병신,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현정은 눈을 삼 분의 이는 감고 제 몸도 못 가누는 영준을 붙잡아 일으켜 일 층으로 끌고 내려왔다. 저보다 큰 체구의 비실거리는 영준 때문에 같이 계단에서 구를 뻔 했던 게 무척 화가 났다.

 

부엌 옆에 달린 뒷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간이식당의 의자에 던지듯 앉혀놓고는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동정심보다는 그냥 짜증이 났다. ‘왜? 지가 뭔데 선수를 치는 거야? 내가 모를까 봐? 엘에이 가기 싫어서 오늘로 날 잡아 쇼하는 걸 내가 모를까 봐? 개자식.’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 밖의 다른 감정들은 송두리째 먹어 버렸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거다.

 

부글부글 현정의 마음처럼 커피가 끓으며 집안 가득히 커피의 향이 퍼져갔다. 한 번도 아……! 하는 감흥 없이는 맡아본 적이 없었던 그 향기로운 커피의 향이 오늘은 아무 색깔도 맛도 없었다. 진하게 끓인 커피를 한 잔 머그에 가득 따라 영준의 입에 들이대 주었다.

"야. 이거 마셔!"

어렵게 무거운 눈꺼풀을 열은 영준이 커피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뜨거운 잔이 입에 닿자 움찔했다.

"지랄하네"

예전 같으면 생각도 못해 볼 그런 말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잔인해졌나? 하는 생각을 하며 부엌으로 가 찬물을 조금 넣어 미지근하게 만든 다음 다시 영준의 입에 대어 주었다. 반쯤 마시고는 잔을 밀어내는 영준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며,

"다 마셔!"

명령조로 말하고는 다시 영준의 입에 커피머그를 쑤셔 넣을 듯이 갖다 대었다. 억지로 다 마신 영준은 다시 잠에 떨어지려고 몸을 달팽이처럼 웅크리며 의자 속으로 꺼져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몸이 앞으로 구부러지나 보다 했더니 "욱" 하고 방금 마신 커피를 바닥에 다 토해 버렸다.

"그걸 다 토하면 어떡해?"

현정은 짜증 섞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정신이 없던 영준도 눈을 한번 크게 뜨고, 페밀리 룸에서 TV를 보고 있던 아들 인수가 뛰어나왔다. 인수는 눈앞에 벌어져 있는 광경이 믿어지질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분노를 삭히려는 듯 문을 거칠게 열고는 지하실로 내려가서 바가지를 한 개 들고 와 현정에게 내밀었다. 페이퍼 타올을 둘둘 말아 바닥을 닦는 현정의 분노는 점점 더 집채만한 파도가 되어 밀려오고 있었다.

 

"인수야, 커피 한잔 더 끓여라."

아들에게 명령하다시피 부탁을 한 다음, 얼른 이 층에서 새 옷을 가져와 커피얼룩으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영준의 옷을 갈아 입혔다. 마치 가사를 돕는 로봇 같은 행동이었다. 어쩌면 그 향긋하기만 하던 커피 향이 뱃속에 한번 들어갔다 나왔다고 이렇게 역겨운 냄새로 변할 수 있을까? ‘아니야, 이건 이 더러운 인간에게서 나는 썩은 냄새일 거야. 그래, 맞아. ‘ 이런 생각을 하며 축 늘어져 있는 영준을 한 번 더 째려보는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다시 커피가 끓여지고 영준 입에는 강제로 쓰디쓴 커피가 퍼부어졌다. 아마 인수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합쳐져 더 써졌을 거다.

 

"아티반이 몸에서 흡수된 후 그 효과는 8시간에서 10시간은 갑니다."

전화선을 타고 걱정해 주던 약물중독협회 상담자의 소리를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꺼버린 현정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의사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놔둘까? 오늘은 마침 토요일이라 의사도 오피스에 안 나올 거다. 에라, 그냥 좀 두고 보자. 죽지는 않을 테니까. 또 죽은 들……,’  여기까지 생각이 전개되자 더럭 겁이 났다. 자기 자신에게.

 

잠이 쏟아져 못 견뎌 하는 영준을 끌고 뒷골목으로 나갔다. 억지로 더러운 송충이라도 잡는 기분으로 팔을 붙잡아 의지하게 하고는 골목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잠을 깨우기 위해 왔다갔다 하고 있는 중이다.

"너, 그년 보호하려고 약 처먹고 쇼하는 거지?"

"아니야."

"병신, 지랄하네, 내가 모를 줄 아냐?"

"아냐, 지인…짜야, 니가 날 엘에이에 두우…고 온다고 해서 차아..라리 죽는 게 나아…라고 생각했어."

"니 거짓말에는 이젠 안 속아 넘어 간단 말이야. 죽으려면 철저하게 해야지. 치사량도 아니고, 내가 깨울 시간도 다 계산에 넣고 시간 맞춰서 먹은 게 뻔하잖아? 그래가지고는 못 죽는단 말이야, 연극을 하려면 좀 더 치밀하게 해야지. 너 내가 간호사란 걸 잊었냐?"

그냥 자빠져 버리게 뒤에서 발로 걷어차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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