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만들어 낸 이야기

미시간 호수로 지는 해 - 3

doggya 2012. 3. 11. 03:56

문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어색한 듯 쭈그리고 앉은 현정 앞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은 그는 현정을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피스로 오라고 해서……."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응, 왜 사람들 앞에서는 발표할 수 없다고 했는지 알고 싶어서 오라고 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럼, 이번 한 번은 리포트로 대신하는 것을 허락을 해주지만, 앞으로는 연습해 보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나?"

"오케이……."

"그런데 너 결혼했다면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 질문에 미소로 답하는 피터 교수를 보며 현정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첫 수업시간에 빠져있는 출석부를 체크하러 나간 현정에게 피터 교수가 던진 질문이었다. 결혼은 했는지 그리고 아이는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난, 네가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나하고 친구할 수 없니?"
"응?"

의외의 질문에 현정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혼한 지가 10년이 넘은 피터는 장성한 두 아들들과 떨어져 혼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현정의 식구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 낯설고 연고도 없는 미국생활에 도음이 필요할 때는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참말로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너, 결혼생활 행복하니?”

어느 날 피터는 점심을 함께 먹으며 느닷없이 물어왔다.

“그건 왜 물어?”

“응…… 그냥 궁금해서.”

‘그게 왜 궁금한데?’ 혼자만 알고 있던 치부를 들킨 거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보기엔 네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고, 그렇게 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 건 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냐!”

거의 발작적으로 내뱉었다. 예상치 않던 현정의 반응에 놀란 피터도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피터가 왜 그렇게 든든하게 보이는지.

 

천신만고 끝에 학교를 우등생으로 마치고 현정이 간호사로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저축이 생기게 되자 이젠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던 월세 아파트 근처에 방이 3개 있는 자그마한 집을 하나 장만했다. 이것 저것 고칠 것이 많은 집이었지만 영준도 또 현정도 피곤한 줄 몰랐다. 이제는 행복할 일만 남은 거 같았다.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아서도 다음엔 어딜 어떻게 고칠까 하는 것이 화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약간은 들뜬 거 같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은 영준이 입을 열었다.

 

"나, 엘에이로 옮겨 가야 할 것 같아'"

"아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엘에이에 괜찮은 직장이 하나 생겼는데.."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도 그럴싸한 직장 하나 못 잡고, 박사학위도 중도포기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허드렛 일을 하고 있던 영준의 얘기였다. 불법체류자가 되거나, 한국으로 나가야하는 시점에 도달했을 때는 정말로 미웠다. 영준을 대신해서 힘들게 직장을 잡고 영주권을 해결했다. 대학갈 나이가 가까워져 오는 인수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장 먹고사는 문제 하나도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영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주권이 없어서 좋은 직장 못 구한다고 변명하던 영준은 영주권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언제나 핑계는 있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우리가 어떻게 가? 인수 학교도 있고, 내 직장도 있고, 집도 산지가 얼마 안됐는데."

전문직은 아니지만 어쩌면 영준이 자신의 의기를 한번 펴 볼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선 혼자 가서 한번 살아봐. 그러다 거기 직장이 안정되고 여기에 모든 게 정리되면 합치지 뭐."

이렇게 해서 영준의 엘에이에서의 혼자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만이 많았다. 이래서 안 좋고, 저래서 안 좋고, 고만두겠단다. 그리곤 다른 직장으로 옮겼다. 이런 영준을 믿고 어떻게 어렵게 이루어 놓은 현재의 터전을 절대로 버린단 말인가. 좀 더 길게 시간을 두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정은 바쁜 틈을 내서라도 3주일에 한 번씩 비행기로 4시간 걸리는 곳을 찾아갔다. 반찬을 해서 냉장고를 채워주고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도 가지며 며칠씩 있다가 오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연애하던 시절로 돌아 간 듯 처음에는 그런대로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영준은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 만날 때마다 불평만 늘어놓았다. 그러던 영준의 투정이 어느 날엔가 뚝 그쳐버렸다.

어떻게 요즘은 불평을 안 하네. 괜찮은 가 보지?

"응, 여기 사는 것도 점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아."

"그래도 빨리 합쳐야 하지 않겠어? 자기 여기 생활이 안정돼가는 거 같으면 시카고 집을 정리할까?"

"아냐, 너무 서둘지 않아도 될 거 같아. 여기 직장이 어찌 되는지 좀 더 두고 보고."

달라진 영준의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영준이 일주일간의 휴가를 얻어 집에 와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어딘가 상당히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현정은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에 한 번씩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잠깐씩. 그리고는 저녁만 먹었다 하면 조금 있다가 바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집에 온 이후 한 번도 잠자리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냥 피곤해서 그러려니 했다.

 

"누구한테 전화했어?"

가게에 갔다가 우연히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공중전화에서 몸을 비비 꼬며 전화를 하고 있는 영준을 목격했다. 그 분위기만으로도 특별한 전화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머리로 온몸의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몰려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피가 파란 하늘로 치솟아 그 고운 파란색과 섞여서 칙칙한 보라색의 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 세상이 모두 더럽게 물들어 버린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여유있게 걸어오고 있는 영준에게 물었다.

"응???"

"봤어, 솔직히 얘기해."

"……. 편하고 좋아서 같이 있고 싶었던 사람이야 우린 이미 몸을 섞은지도 한참 되었어."

"그래? 그럼 항상 같이 있어.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

"알았어."

 

어두운 분위기의 마지막 저녁 식사였다. 인수의 생일저녁이기도 한. 인수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

"그건 사랑도 아니었어. 한번만 용서해 줄 수 없을까? 나, 가고 싶지 않아. 한 번만 용서해줘.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정말 해까닥 했었나봐."

저녁을 먹고 난 후 영준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입을 열었다.

"그래? 혼자 못 가겟다면 같이 가 줄께. 널 데려다 주고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 주지. 내 앞에서는 서지 않던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었구나.

그게…… 언제부터인가 너를 생각하면 주눅이 들었어. 아무리 세우려 해도 그게 되질 않았다구. 하지만, 나 앞으로 노력할게. 정 안 되면 비아그라라도 먹어 볼게.

웃기네. 그게 노력한다고 될 일이니? 아무 문제없이 잘 서게 해주는 사람한테 가. 그래야 너도 행복할 거 아냐. 그리고 이러는 나를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한 번은 용서를 한 적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겠지?."

 

“여자란 한 번 출가하면 남편을 하늘같이 섬기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하느니라.”

어릴 때부터 유학자이신 할아버지한테서 영의정의 후손이라는 집안의 족보와 함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온 소리였다. 실제로 소실 때문에 혼자 사는 집안 어른들이 몇 분 계셨다. 그 분들은 남편의 도움 없이도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꿋꿋하게 살아 나가는 본보기가 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현정에게 있어서 가정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첫 번째 외도는 용서했다.

 

절망적인 표정의 영준은 바닥에서 의자로 올라 앉으며 말을 이었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인기도 좋고 또 열심히 나보다 멀리 뛰어가는 유능한 너를 보면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어. 그래서 어떤 때는 그런 자신만만한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어. 내가 참 못 났다는 생각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정말 미안해. 날 내치지만 말아 줘. 깊이 반성하고 있어.

영준은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그걸 귓전으로 흘리며 현정은 냉장고를 뒤져 맥주 한 병을 단숨에 마시고는 잠을 청했다.

“그랬었구나.”

어찌 맨 정신으로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술 기운이 오르자 피터 생각이 났다. 보고 싶었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 같은 그의 품에 안기어 울고 싶었다. 위로 받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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