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만들어 낸 이야기

늪 - 1

doggya 2013. 6. 1. 02:13

이런 느낌을 쾌감이라고 부르겠지? 아니 이런 건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적어도 그 안에는 죄의식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온몸에 쌓여 있던 이물질이 모두 밖으로 밀려 나간 후 가벼워진 몸이 구름 위에 붕 뜬 거 같은 황홀함을 느끼며 진우는 몸을 굴려 천정을 바라보고 누웠다.

이 건 분명 행복은 아니야. 그래도 아직까지 인영한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황홀감이 너무 좋다. 하지만 더 이상 계속해선 안 될 거야. 그냥 한 번의 실수로 묻어두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머리를 돌려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자듯 누워있는 인서에게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 인영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진우에게 다가온다. 그러자 정말 해선 안 될 일을 했다는 죄책감이 온몸을 번개가 가지를 치듯 번져 나가면서 그런 죄의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묘한 느낌이 아랫도리에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서의 머리를 덮고 있는 시트를 벗겨 내리며 뜨거운 몸으로 다시 한 번 인서를 끌어안았다. 조금은 밀어내는 듯한 몸짓이 진우의 마음에 바로 불길을 댕기기에 충분했다.

왜 그래? 내가 잘 못 한 건 알아. 하지만 니가 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난 형부가 거실에 계신 걸 몰랐잖아요.?

수퍼에 가서 우유만 사가지고 금방 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배시시 웃는 얼굴에 살짝 눈까지 흘기며 콧소리를 섞은 원망의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스쳤을 때 진우는 인서의 몸을 더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인영에게서는 못 보던 모습이었으니까. 이 순간만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인영을 잊고 싶다.

그냥 인서에게 파묻혀 모든 걸 잊고 쾌락에 빠지고 싶다.라고 진우는 생각하며 다시 암흑같은 어둠과 그리고 인서에게 빠져들어 갔다.

 

오전 내내 바쁘게 돌아가던 사무실이 조금 한가해 지고 점심시간도 가까워 오자 진우는 의자에 걸쳐 놓았던 쟈켓을 걸쳐 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에 있을 때와는 달리 강하게 내려 쬐는 햇볕에 눈이 부시고, 벌써 여름이 오는지 입었던 쟈켓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는 차를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다리가 무거운지 누군가가 뒤에서 잡아 끄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럴 수 밖에 없겠지  누구에겐지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차로 걸어갔다. 오전 내내 주차장에서 햇볕을 받고 서 있던 차는 무척 더웠다. 창문을 내리니 조금은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치며 조금은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라않혀 주는 듯 싶다. 시동을 걸고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왔을 때 어느 쪽으로 가야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것도 잠시, 결국 진우는 식당 쪽이 아닌 병원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다른 때와는 달리 진우는 오늘 아침 인서를 병원 앞에 내려 놓고는 인영의 병실에 들르지 않고 그냥 사무실로 와 버렸다. 인영이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아직가지 그런 일이 없었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부지게 먹어도 오늘 아침만은 인영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이제 겨우 고비를 넘기고 아직 안심하기엔 이른 아내의 눈을 마주 바라 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서를 곁에 두고 평상시처럼 말을 나눈다는 건 생각 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쩜 인영도 의아하게 생각했을텐데 무어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병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상황이 참 싫어진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인서는 아침 내내 언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한참을 문앞에서 망서리다 문고리를 잡았다. 전에도 문이 이렇게 무거웠던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문을 열고 어렵게 한 발을 안으로 들여 놓았다. 인영은 여늬 때와 같이 침대에서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고 인서는 앉았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진우를 맞으러 걸어왔다. 진우는 그러는 인서를 그냥 지나쳐 침대 옆으로 가서 인영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아침에 급한 일이 있어서 들리지 못하고 그냥 갔어.

아냐, 괜찮아. 인서가 있어서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는 걸. 앞으로도 바쁜 일 있으면 일부러 올라오지 않아도 돼. 인서가 있는 동안은 말야.

진우는 힐끗 뒤에 서 있는 인서를 바라보았다.

 

인서는 나이 사십이 넘었지만 아직 혼전으로 한국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인영에게는 언니 하나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인 인서가 있지만 어머니를 인서가 모시는 때문에 인서에 대한 인영의 애정이 각별하다. 인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번에 언니를 간병하기 위해서 한 달의 휴가를 받아서 올 때도 여비를 모두 인영이 부담했다.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집에 경제적으로 인영이 준 도움이 아니었으면 인서와 어머니는 아마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인영은 경제 활동면에서는 진우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재주가 있고 또 운도 있어서 지금까지의 부를 축적한 건 인영의 몫이 컸다. 그래서 친정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서는 진우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인서의 표정과 태도는 어제의 이 시간과 하나도 다른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는건가 하고 진우는 의아해졌다. 자신은 지금 인영의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지금까지 인서에게 이런 당돌한 면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당돌해 진걸까를 생각하면서 진우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인영이 말기 위암 판정을 받았던 것은 15년 전의 일이다. 인영은미국에 와 회사에서 퇴근시간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하며 인정을 받아 사다리를 올라 보겠다는 꿈을 안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는 열혈 여성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데리고 온 어린 아들인 민철을 돌보는 것은 자연히 진우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 덕으로 거의 자기 부서의 메니저 자리에 임명이 될 즈음 인영은 몸에 이상을 느끼게 시작했다. 항상 피곤하고 피로도 잘 풀리질 않을 뿐더러 음식의 맛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가까운 친구의 권유로 건강진단을 받아 보게 되었다. 그 결과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말기 위암이었던 것이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가 있으니 수술을 한 번 해 보자는 의사들의 제안을 받아 들여 수술대 위에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열어 본 결과 수술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 손도 못 대보고 그냥 다시 봉합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영에게 길게는 3개월의 시한부 삶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