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행복님의 삶

♧창덕궁 나들이 (돈화문 ,궐내각사 ) ♧

doggya 2019. 10. 25. 19:06

♧창덕궁 고궁 을 다녀오고나서♧


#자작글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오늘이다.
아침에 눈을 떠 창밖 눈부신
아침햇살을 보면서,



설레이던 창덕궁 고궁투어를 나셨습니다
늘 새로운것에대 한 설레임 가이드선생님의 설명에 새로운것


많이 터득하고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구중궁궐 깊은 이야기를 임금님과 생활상 그리고


역사 정치 그리고 저보다 물론 연배의 선생님도 계시지만 아랫 사람을 배려하는


띠듯한 마음씨 봉사정신에 보이차와
쑥차 과히 환상이었습니다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여려님 하지만


대문열고 들어가면 우리네 인간사도
많은 사연이 많겠죠 오늘이 제역사상
1창덕궁 투어 2.점심식사.3수제맥주

4.소나타노래방 5 간단한뒷풀이

5차까지 간것은 63 숫자에 평생처음
기록해둘것 같네요
평생처음인것같네요 흔히 2차까지

가더라도 좋은분들과 구면인 뷴도

계시나 처음만난분들도 댓글 로 게시글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만남
오늘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이 희망이고

나의 귀에 들리는 것이 기쁨이고 생각됩니다
내나이 벌써 육십하고도 셋.

신상 다공개 되었나요...
그리고 멋지게 젊음을 불태운 젊은분들
지난 세월의 그림자들을 바라본다


저절로 업되고 힐링 그자체였어요
짧지 않은 세월과 시간들을 보내면서
어찌 내 마음이 흡족하기만 하였을까요

울퉁 불퉁 돌부리에 채이기도 하고,
거센 물살에 맥없이휩쓸리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각자 살아 온 환경이 틀리고


하면서도 공감되고 공유되고 참좋았어요
수많은 시간들을 채워왔듯이 리더님의

인연으로 또 다른 귀한 인연 만남에
고맙습니다 함께 할수 있었기에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건 함께 호흡하는


짧은 순간이나마 참 사람들이 제
곁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채워줄,


손을 뻗으면 닿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기억해 주는 사람들
그들은 나의 등불이고 희망이고
미래인것 같습니다


오늘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긍정의 눈을 떠서 시야를 넓히고
배려의 귀를 열어 소통의 귀를 열어 주고


그리고 두서없는 생각을 잘정리해주시고 내가 생각하는 "일명자본주주의 사상과 또다른 타인:


생각하고 하는것은 참다르구나 나와 또다른 다른형태의 여려분들과 만남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내게 말허고 싶어요
오늘 내 이름 불러 주는 이 있어

고마워하고
그리고 내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해 주는 이 있어

감사하다고. 남해에서 장어 괴연
돈주고 도 살수없는 그분의 사랑이란

소오스까지 첨가되어 폭풍 흡입 그리고 이뿐따님 친구분 모두 잘내려가셨나요

먼저 가신분들도 인사도 못드렸으나
조심히 내려 가셨겠죠...
셀 수 없는
수많은 추억과 흔적과 기억들이

실없이 미소짓게 합니다
오늘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되고,
수많은 시간을 거쳐 쌓아온


긍정적 삶이
오늘 나를 있게 해주었기에
이런 이유 하나 만으로도
오늘에 감사하렵니다


지금 이시간,
밤은 적막속으로 달려가고
시간은 세월의 그림자를 밟으며 또 하루를 마감 하려합니다


내일을 위한 오늘은 오늘만난 모든분들에게
큰 행복의 날이 였겠죠


울리더님 리딩하시느랴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창덕궁 설명해주신 가이드신생님 너무 꿀 해석 멋진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9년 10.19.토요일
2019년 10.20 일요일

※삶의글 출석부대신하겠습니다

포스팅은 사진보고 할께요
즐거운 주말 되십시요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가로 576cm 세로 273cm 이며 국보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조 30년에 불타버린 환경전과 순조 34년에 중건된 통명전 경복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대는 1826년 ~ 1828년 경으로 추정된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먹과 채색 물감으로 당시 궁 안에 실재했던 누정, 다리, 담장은 물론 연못, 괴석 등의 조경과 궁궐외곽의 경관까지 세밀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화공기법과 정밀성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동궐도는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궁궐 연구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발췌 )


*경복궁에서 왕자의 난을거쳐왕위에  오른 태종은  한양에  도하나의  궁궐일짓습니다

창덕궁이랴고합니다

태종실록   1404년


*창덕궁은  무려  270년간 정궁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연산군 효종   현종   숫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자   저와함께    창덕궁   고궁 걸어보실래요 


#신정문 신하들이랑  국사를  논의  했던곳으로   신정전으로  향하는문

#창덕궁

조선의 왕들이  가장 사랑하고 아낀창덕궁19 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경복궁외    그어떤 고궁도   아직 등재되어  있지않다고   합니다

창덕궁만   등재되어있다는 것   처음 알았네요 


창덕궁 정궁으로서 모두복합적인 공간이라고합니다  

정치와  궁의  생활상    대궐이라고  설명이  계썻습니다


구중궁궐   정전 편전 침전  후원  

1412년(태종 12)돈화문 건립

돈화문(敦化門:보물 383호)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창덕궁의 정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홈페이지서 발췌  

 무슨  행사를  하고있었습니다 




어가행렬   행사인지   길을  비키시오   ~~~~~~~~~

우리는  설명을듣다가   이동   했습니다 





우리는  여려분들이 가는 방향되로  안가고    사이드로이동합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돌다리랴고합니다    가이드선생님의 설명 



금천교(錦川橋)(보물:제1762호)

금천교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규모는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되었으며, 상면은 길이12.9m, 너비 12.5m로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구조는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을 토대로 홍예를 2개 튼 형식으로 물가의 축대는 부벽(扶壁)구실을 하고 있으며,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에돌을 얹었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그 위에 동물상을 조각한 이주석이 세워져 있다.

난간은 머리 부분을 연화보주형(蓮花寶珠形)으로 장식한 법수와 그 사이에 세운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석은 하엽동자기둥(荷葉童子柱)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2칸으로 분절되었고 칸마다 안상을 투각하여 놓았다.

법수 밑에는 멍엣돌 위치에서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모양을 환조(丸彫)로 조각하였다.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귀면형(鬼面形)이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로 만든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발췌 )

                   






고궁을   투어하다보면  지붕위에  경복궁에서도  있고  경회루 11개 창덕궁  돈화문에서도7개  

각전각에서도   아마 보면  나타날것입니다    제각각이고    모양은  비슷하나  잡상이라고   한답니다 

손오공    삼장법사    사오정 잡상은   서유기에서  나오는  인물과   토신들을  형상화


손오공이  잡상으로   기와지붕에   놓이게된것도  역시서유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원숭이는 꼭들어간다고   합니다  원숭이의 정체는  손오공

손오공은 힘이세고   자유자제로변신을하고 여의봉가지고  있고  요괴를 물리치고

그래서   기와지붕에  

토우를 얹기시작했었고  세월이흐르면서   사자와해치 봉같은   토우도  올라갔다고합니다


저지붕위의있는것은 잡상이라고   한답니다 









*창덕궁  입장료 

아   제가  입장료를  예매하지  않고  단체로 예매 

(내국인 )

*개인 입장료   \3000원

*대인   10인이상 \2400원

*국가유공자무료 본인및배우자

외국인

*소인  만7세  ~만18세\1500원 (10인이상   \1200원 )

*대인   만19세~만64세 \3000원 (10인이상 \2400원 )

*휴관일   매주월요일 


아   한복을  입으면 무료랴고하던데    지금도 그련가  


조선왕실이     사랑한 궁궐 창덕궁    사게절 방문해도  아름답고 멋질것 같아요  

저도  아마   4년만에   창덕궁또다시  찾나봅니다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종묘   하물며    운현궁 까지   다녀왔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내키면  올가을 또다시  고궁투어해볼까나  귀추가주목됩니다  

나랑  고궁투어할사람  여기여기붙어라   ~~~~~~~~~~ㅋㅋㅋㅋㅋ 

또다시   공무  하는 셈   치고    기회를 주신   리더님   그리고   저멀리에서

   해설을   해주신  가이드선생님 

해박한  꿀지식에  뽕빠져봅니다  

혼자서  자충우돌   투어할때  보다     알지못하고  

제데로  모르는  지식을  알려  주셔셔   쫄래쫄래 빠짝 따라다니면서도 

열심히     청강생 노릇  뒤돌아서면 잊어먹더랴도



알지못한 공간   놓쳤던 공간까지도  머리속에  쏙쏙 집어 넣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비공개되는 공간이라고  한것 같은데요

민비  명성황후도  쪽문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지금의  중요한    청와대   어느부서일까요  

대통령  경호실쯤될까요    설명해주셨는데  뒤돌아서 서  잊어먹었어요   ㅠㅠㅠ


궁궐에는 이상한쪽문들이 많았는데    정문은 문무대신이주로   출입하고   쪽문들은  지금으로치면 

약간 은밀한문일까요     




돈화문을 거쳐  들어오면 옆으로  궐내각사가있어요


#궐내각사

궐내각사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창덕궁 홈페이지서발췌  )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 안에 설치되었는데, 이를 궐내각사라 부른다.

  궐내각사에는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살피는 내의원(약방),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등이 있다. 대부분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고, 금천교를 경계로 경관을 이루고 있는데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어 미로처럼 구성되어 있다



#화살나무 

#진선문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중문

창덕궁  창건무렵에  세원진것으로추정   1908년  개수공사때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 완료 

용도는   백성의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  역활 이라른 설명 

  동문고라 불리는 북을 태종때  진선문에 설치했고 

중간 유명무실했다가 영조때다시 설치했다고  합니다



대궐에는  쪽문이많아요  ㅋㅋㅋ





#옥당 

국정을 논하며  지금으로치면  불온서적   검색   춘화도 

뒷마당입니다  

음료  물도  먹을려면 몰래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여기서   잠깐쉬어서  간단한 음료  와   휴식 쉬어가기    

헉   천기누설인가요    

*고궁은   내의모든  공간은   금연구역입니다 

*음식물 반입금지  

*각종  야영용품  돗자리  그늘막  취사도구일체반입금지

*안내견  외   (장애인 보조견 )이외의   애완동물 출입금지  



다음은 검색한 자료입니다 

창덕궁 궐내각사 동편에는 옥당, 약방, 예문관을 비롯한 관청과 선원전의 부속 건물인 영의사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앞에 위치한 옥당(玉堂)은 홍문관(弘文館)의 다른 이름이다.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 중 하나로, 임금의 자문기관이자 권력을 통제하는 일을 맡았다. 그밖에도 각종 서적들을 관리하고 경연, 서연 등을 주관하기도 했다.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大提學)은 정2품으로 정1품인 정승보다 품계는 아래이지만 '불여일대제학(不如一大提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승보다 더 존경받는 자리였다. 실제로 대제학을 많이 배출한 가문을 뼈대있는 양반으로 대접하기도 했다.

홍문관은 집현전(集賢殿)이 세조대에 폐지되자 1463(세조 9)에 양성지의 건의를 계기로 설치된 관청이다. 삼사로서의 기능은 1478(성종 9)에 비로소 갖추어졌다. 1504(연산군 10)에 진독청(進讀廳)으로 이름을 고쳤으나, 1506(중종 1)에 다시 복구되었다. 이후 이괄의 난으로 인해 경덕궁(慶德宮, 지금의 경희궁)에서 거처하던 인조가 1632(인조 10)에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위해 옥당 건물 수리하여 경연청(經筵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경연청은 임금이 덕망이 높은 신하를 불러 강론을 하던 곳이다. 홍문관은 고종대에 다시금 변화를 겪게되는데, 1894(고종 31)에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경연청, 경연원(經筵院) 등으로 바뀌었다가 1896(고종 33)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쳤다. 홍문관은 1907(융희 1)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창덕궁 옥당은 조선 초기에는 없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궁궐을 복구하면서 새로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은 탓에 창덕궁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온 결과다. <궁궐지>에 따르면 옥당 자리는 옛 사인사(舍人司)가 있던 곳인데, 영조가 적은 '학사관(學士館)'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한다.

건물은 광해군대에 지어진 이후로 몇 차례 수리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소실되지 않고 형태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7(융희 1)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창덕궁이 대대적으로 서양식으로 개조되자 궐내각사 일대에도 큰 변화를 겪었다. 1911년에 제작된 <창덕궁평면도>에 따르면 옥당을 비롯한 동쪽 궐내각사 건물은 선원전을 제외하고 모두 훼철되었으며, 이 자리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창고 겸 검도장이 들어섰다. 창고 앞에는 꽃담을 둘렀으며 꽃담은 인정전 행각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건물은 광복 후에도 한동안 검도장으로 사용되다가 창덕궁 복원 사업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옥당 앞에는 ''자 형태로 된 낮은 사고석 담장이 남동쪽, 남서쪽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두 담장은 서로 떨어져 있어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담장과 담장의 떨어진 공간을 통해 전각으로 진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남동쪽 담장에는 따로 일각문을 냈다. <동궐도>를 살펴보면 담장 안쪽과 전각 뒷편에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소나무를 심고, 가장 넓은 기단에는 용도가 불명확한 설치물 2(붉은 원표시)를 두었다. 추측컨데 담장은 설치물이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안, 보호의 목적으로 쌓은 것이고, 일각문은 기단 위를 출입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 여느 일각문과는 달리 문짝에는 청색 휘장이 둘러져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옥당 앞에 있던 설치물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임금이 홍문관에 은배(銀杯) 2개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 설치물이 은배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임금의 하사품을 밖에 내놓고 눈, 비를 맞게 했다는 것인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근 복원된 옥당에도 <동궐도>와 같은 담장이 둘러져 있으나 기단은 복원되지 않아 차이가 있다. , 남동쪽 담장과 옥당 남행각을 잇는 담장을 세우고 그 사이에도 일각문을 세운 모습으로 <동궐도>와는 다른데, 이는 창덕궁 복원을 순종대에 제작된 <동궐도형>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옥당에 걸었던 편액은 인경왕후의 오빠인 김진규가 1699(숙종 25)에 쓴 글씨다.

 



#해꼬지   쩌뽀족한용도는     가이드선생님의   해꼬지라는  설명에  우리는  빵 터졌습니다

새들이   배설 (똥누지  못하게 )똥꼬를  찌르게    만들었다고   조상님들의  지헤라고합니다 


지붕위    기와모양입니다  

저혼자다닐때는 몰랐던것 

위에는 목숨수자와  

아래에는  거미모양이라고합니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려고 보니   기와지붕이   모두그렇게  생겼더군요 

혹시  고궁투어할  기회가생긴다면  한번 유심히 봐보셔요  


목숨 수자와   거미모양  





우리는 인정전을 향할려다가    행사를  하고  있어서  소란스렵고 방해될것 같아서요


#숙장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中門)이 숙장문이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에는 직사각형 마당이 있고, 마당을 빙 둘러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을 비롯하여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있다. 숙장문을 통과하면 내전으로 갈 수 있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숙장문 [Changdeokgung Sukjangmun Gate, 昌德宮肅章門] (두산백과)



과거시험을 보는 지  행사가  재현되고  있었어요 

무슨시험인지 모르나  우리가고궁투어끝날때가지  시험을보고  있었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음에도  보여드릴께요  



2019년  10.19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