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행복님의 삶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종주 완료 ♧남산 목멱구간

doggya 2020. 2. 15. 19:10

♧한양도성 순성길종주완료 ♧
*일행 3명

#그녀의 여행기

#만보실적



#자작글~-
♧그녀는 용감했다♧

서울 동서 남북 다찍다

한양도성 4대문 4소문


* 동대문 (-흥인지문)~-인을 일으키는문
*서대문 (돈의문)의를 돈독히 하는문
하지만 일제때 철거
*남대문 (숭례문)예를 숭상한다하여

*북대문 (정식이름은 유교 사상에 따라 인의 예지랴고 지었으나

지를넣어 숙지문 하지않고 숙청문 청을넣어 숙청문 그려나 지금은 숙정문

숙청문은 위치상 거의통행되지 않고 장마가 지면 비그치기를 기원
영제가 기청제를 거행하였으며

또 예종때는 가문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에 듣고

  음기서린 북대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 중종이후 모든기록에 숙정문나타나고 있으며 

 새로 복원된 현판에도 숙정문 걸려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닫아두고 비상시만 개방

#4소문 4대문사이에 있는작은성문
*동소문 =혜화문 (중종때 혜화문이라 불림)
*서소문 =소의문 (일제에의해철거)
*남소문 =광희문   ()
*북소문=창의문 서울도성의 4소문 가운데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문 자하문이라고 합니다

4소문이 있다고합니다




#동대문 (흥인지문)

#동대문

흥인지문은 도성의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흥인지문 외부를 반달모양으로 감싸고 있으며,

북쪽 한쪽만 개방하여 출입하도록 하고 나머지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397)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옹성을 쌓아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동소문 (혜화문)



*혜화문 (동소문)복원
처음에는 홍화문이하고했으나
창경궁 홍화문이 있어서
나중에바뀜


아래사진은  낙산 구간   투어하면서  찍어둔사진입니다 

인물인증샷과    사진 몇컷은  카톡으로  받은 사진도 있음을 밝혀둡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翼工式) 우진각지붕건물.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웠다. 이 때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하였으므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졌다. 당시 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에 혜화로 고쳤다.

건물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 뒤 한말까지 동북 방면의 성문으로 보존되어오다가 1928년에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헐렸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문의 모습은 아래쪽에 하나의 아치형의 출입구를 둔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의 형태를 취하였다.

육축에는 하부를 큰 장대석으로 받치고 그 위에 무사석(武砂石 : 돌로 층을 지어 높이 쌓아 올린 축석)을 불규칙하게 쌓아올렸으며 위쪽 좌우에 2개의 누조(漏槽 : 홈통)를 돌출시켰다. 그 상부에는 낮은 담을 쌓아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가퀴[城堞]를 두었다.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이 일대를 새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는 말이 전한다.다음 백과 (한국 민족 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성곽길을  걷다보면  지붕에  취두

   (매머리모양장식 )올려져있어요   새들의   피해를   보호하고져했다고 

합니다

전에  등록했던 글입니다  저외에

   한성 도성순성길은 투어는 2019년 12.5일  혜화문 낙산구간에 서 시작했습니다 



(혜화문  성곽길에오르면서 찍은사진입니다  )


완전 무장 한채로  아마  제독자라면 익숙한 사진과 글일것입니다 

이해들 돕기위하여서요 

서대문역 강북삼성병옆에
*서대문 (돈의문)
지금서대문역일대가 돈의문도로확장한다고 철거
돈의문터 표지석도흔적도 없다

깨알같은 글씨 관심있는분은 클릭
위치는 돈의문 박물관건너편과 삼성병원옆에~~벽에적어져있어요

전에 돈의문성곽터
2서대문 (돈의문)소실 강북삼성병옆에 도로가에 표시된글자만




*서소문 (소의문)소실



3남대문 (숭례문)



*남소문 폐쇄 ( 남소문터) 시구문 시체가나가는문
죄인들도 이문으로 나갔다고한다


광희문 복원

광희문천장


4북대문 숙정문)


유일하게 가로로 읽으며
현판은 박정희대통령 친필이라고합니다

*북소문 (창의문)

숙정문과 창의문은말바위안내소에서표찰을 받아야
입장가능
창의문입니다
만약 제독자라면 익숙한 내용이겠죠

그녀는 용감했다

서울수도권 나들이

서울 구석구석 돌아보기 교통카드한장들고 도시락싸들고
한양도성 순성길 다갔었네 백펙둘려메고

동서 남북 다찍다
현장에느낀이야기 어떤분에게 성곽 길문의하니 41년동안 살았는데끝이라냐

우물안 개구리 정확히 모르면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죠 본인이 다아는것처럼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산책이목적이지


도성길은 전혀 관심도 없다 ㅋㅋㅋ

또 어떤분은 돈의문터 열심히 알려주는분도 알고져 하고 관심을
가지면 알지만 무관심함분은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정표 보고 지도보고 한양도성
순성길 출발 지점부터 종료 지점까지 모두 발도장 쾅쾅쾅~~~믿거나말거나


*1혜화문 ~숙정문 창의문 백악구간 완료

*2인왕구간 ~ 창의문 돈의문터까지완료



*3낙산구간 ~~혜화문~ 흥인지문완료

*4흥인지구간~~혜화문~-낙산공원 ~동대문 (흥인지문도착 (
사진은 모두생략했어요
펙트만~~ㅋㅋㅋㅋ

2020년 2.13마지막코스는 오늘또다시도전
*5남산 목멱구간~시청 출발 ~서소문터~
남대문 ~남산~김유신장군동상~안중근동상 .어록

바위들 ~기념관 ~남산도서관~ 초대부통령 동상 ~김구동상~성곽길 ~케이블카 ~지나서~버스정류장

~남산타워~봉수대~~팔각정~성곽길
국립극장 ~남소문터~또성곽길 ~더신라면세점~~광희문 ~시구문시장~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돔~~이관문~성화봉승대
~(손기정)오관문 (청계천)~시장

~~동대문 (흥인지문)

일행3명*
시청역 9번출구에서출발해서 동대문역
종료했어요


*
소의문터~남대문
돈의문터과 소의문 터일직선 번화가
고층빌딩용량관계상패스

남산 공원 ~ -김유신동상 안중근 광장


김유신동상
부대통령 동상입니다
남산도서관~ 이시영부통령 동상~ 팔각정

안중근 어록 과기념관
한양도성 70%복원
정비는 클릭하셔서 보셔요
봉수대
국사당터
팔각정관광객이없다.ㅋㅋㅋ
*남산타워
남산의볼거리
저번에친구들과 34명갔으나 조용하게
여기저기 발도장
버스정류장

~남산타워 ~국립극장~한국자유총맹
남소문터 ~~무슨호텔 사진봐야알것같아요


*번안트리 클럽 스파 서울~?
호텔인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동상
민위방본 이승만대통령친필
국민이 나라의근본이라은뜻
(그련데 왜정치인들은 국민을 뭐같이생각하고 맨날 시끌시끌 ㅠㅠㅠ)
여기 자주갔는데 이승만대통령동상 있는것 처음알았어요

남산 제이그랜하우스 ~초대대통령 동상

여기서 공원인지 산인지올라갔어요
거기도 성곽 .안으로신라 호텔인지 면세점인지

전 키가작아서   잘안보였어요
정문으로 들어가면 외곽풍경만 감상해도 눈이호강 재미있게구경


하지만 광희문을향하여 고고씽




~ 광희문 ~시구시장 ~한양도성~광희문~동대문

역사문화공원꺼죽데기 ~~신라 호텔면세점


서울하늘은 미세먼지와 안개로뿌였습니다ㅠㅠㅠ
인적이없습니다

*

*


*성화봉
*
#이간수

오간수
전 여기가 제가 빛축제갔던 청계천인줄알았는데 그줄기지만 전혀 다른곳
아무튼 청계천물줄기가 흐르고있었어요
출발지점 시청역9번출구에서 서소문터를 향하여 출발하는사진입니다

~~흥인지문도착 (동대문)
동대문은 4대문에서 첫머리서 확인하셔요


저렇게 서울도성은 한성순성길은 동서남북 백악산 (북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을 좌청룡  우백호
쌓여 한곳도 빠뜨리지않고 완주했습니다

그외에 도성안에 있는 각중  요 한  고궁
다 다녀왔어요 지도속에 나타난것요
(자세한것은 사진에 나타나요 )
*6-경복 궁
*7창덕궁
*8창경궁.
*9덕수궁
*10.경희궁 종묘
*11청계천

*12.인사동
*13.북촌 한옥 마을

*14.삼청공원
*15.운현궁 (흥선대원군)
*16.석파정 (흥선대원군 )별장

우와 서울 한양를 꺼죽데기만 투어하더랴도 배우고 익히며
역사와 지리를 배우다


다람쥐 쳇바퀴돌듯 교통카드 한장들고
백펙둘려메고 서 다음은 어디일까요
귀추가 주목됩니다 그녀의 여행기는


계속됩니다
리딩해주신 대장님
함께해주신님
즐거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을 기약합니다
.

2020년 2.13일 남산 성곽길을다녀오고나서


2020년 2.14일 금요일(본인의  카스에 등록한글 )

자  그럼 저와  함께  남산 목멱구간을  올라 보실래요 



그중간에 다른곳에도  물론 다녀오고요 길상사도  다녀오고  

 석파정도  다녀오고  기타등등 세검정 있는곳도  다녀오고요 

또다시  원점으로 서울 양도성길    모두  오늘에서야광희문을 거쳐서  

  종주완료    동대문역으로요 

지금 서울 시청역 공사중이라서 엄첨복잡해요  웬만한  약속장소 잡을려면 을지로 가

오히려편할것 같아요 시청역은 출구도 많고요 복잡하고요 제경험입니다 

언젠가  며느리러브콜을  조선호텔을 찿아가는데도 출구를 못찿아서  추운날  얼나마   목적지에서

헤메었는지  아직도 공사중이어더군요 


2호선   시청역  9번출구에서  서소문터를(소의문 )   향하여  출발합니다 


#동대문

흥인지문은 도성의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흥인지문 외부를 반달모양으로 감싸고 있으며,

북쪽 한쪽만 개방하여 출입하도록 하고 나머지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397)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옹성을 쌓아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자드디어  동대문까지 다왔습니다   (설명을 위하여   4대문 먼저 올렸습니다 )

종주를 끝내고  찍은 사진입니다  

# 동대문 (흥인지문 )입니다  

#혜화문  

4호선  한성대입구   5번출구맞은편에서  시작

2019년   12.5일   시작해서   2020년 2.13일    종주완료 

혜화문에서  ~광희문 ~동대문 종주  성공   


물론  그중간에 길상사도 다녀오고 석파정도  다녀오고 성북동 일대도정법사  멧돌박물관

성락원  꺼죽데기  가구박물관  겉모습

다녀오고 연산군 묘역길도  다녀오고 북한산  도봉산  쌍둥이 전망대도 다녀오고요

용산  공원  전쟁기념관   월드컵 공원  하늘공원도다녀오고요 남한산성도  다녀오고요   

창덕궁   창경궁  또어데  갔었지  아무튼    서울한양도성 낙산구간 흥인구간 인왕산 구간

백악구간 모두 발도장  쾅쾅쾅 찍은것 아시죠   제독자라면요  

마지막  남산목멱구간으로  오릅니다  


#혜화문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그전에  찍어둔사진입니다 

설명을 위하여  (2019년   12.15일 찍은 사진입니다 ) 

한양도성순성길 우리가    출발지점  

우리는  흔히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시작이  반이다   우리말속담에    있습니다  

 사진 모두  생략하고  출발 지점  몇컷만 추억을 상기시켜봅니다

본인의 블로그에서 이동했더니    사진 싸이즈가 카페보다   작네요 ㅋㅋㅋㅋ

 

                    이때도  한참 복원 공사중이었습니다 

 

                 낙산 구간  정상에서     ~~~~~~~~



이렇게지역과     이름인지     새겨져있었어요 







서울한양도성은   전세계에 도성중   가장 오래된  성의역활을 다한 건축물 이라고합니다   


도성축조  방법  여기에도설명서가  있어서요  또다시 찍었어요

 

무엇인지  열심히   조사하는걸까요   ㅋㅋㅋ?







              #뒤로보이는 건물은 한양도성 박물관입니다 




 


 

2014년 7월 31일 개관한 한양도성박물관은

 2016년 9월 6일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관 하였다고합니다 

언젠가  전시실관람한   기억이나네요   

  

 한양도성의 현재와 과거, 성벽에 남겨진 수많 은 기억들을 소개하고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재조 명되고 있는

한양도성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

1396년 축조된 한양도성은 600여 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수도의 성곽이었습니다

.지형과 한 몸이 되어 축조된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부 훼철되기도 하였지만

, 오늘날까지 그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도시와 공존하는 문화유산입니다.

  • 동대문성곽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 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 ,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입니다.

  •  한양도성박물관에서 600년 한양도성의 역사 와 문화유산으로서의

  • 미래가치를 확인할수 있다고합니다





  • 저번에  설명한  돈의문  ( 소실  ,멸실 )


    #서대문    (돈의문 )소실 멸실

    #서소문 (소의문 )소실 멸실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으며, 인근의 새문안로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유학1915년에 철거되었다





    #서소문  (소의문 )조선시대    4소문의 중의  하나 

    서소문(西小門)

    ⓒ Mark Froelich/wikipedia | Public Domain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있던 서남향의 간문으로 소덕문·소의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이 원래의 위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광희문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처음 세울 때는 성문과 문루를 갖추어 소덕문이라고 했다.

    1422년(세종 4) 주변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할 때 소덕문도 함께 개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 석문, 즉 홍예를 개축할 때 왕이 문 이름을 고치라는 명령을 내렸고, 1744년에 소실된 문루를 완성한 뒤 소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곽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에 통행을 위한 홍예를 내었으며 그 위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구조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문루를 세웠다. 그 주위에는 벽돌로 담을 두르고 양 옆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출처   다음 백과  발췌 


    #남대문


    !.개설

    숭례문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재청 숭례문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후 2010년 2월에 숭례문복구공사를 시작한 이래 2013년에 완공되어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2.내용

    내용

    서울 숭례문은 1396년(태조 5) 축조된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태조 7) 2월에 준공되었다. 그 뒤 1448년(세종 29) 개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며, 화강암으로 구축한 홍예형(虹霓形: 무지개모양)의 누기(樓基)와 마름석축으로 이루어진 기층의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판문에 철갑을 씌운 두 짝의 문이 달려 있다.

    석축기단 윗면에는 전돌로 쌓은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동서 양쪽에 협문을 한 개씩 두어 계단을 통하여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으며, 문의 앞뒤 여장 밑에는 석루조(石漏槽)를 4개씩 설치하였다. 기단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간만이 우물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널마루이다. 기둥은 모두 굵직한 두리기둥인데, 기둥뿌리에 나직한 하방(下枋)을 걸고 기둥머리에는 키가 큰 창방(昌枋)을 걸었다. 창방과 기둥 위에는 널찍하고 두툼한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다.

    공포는 기둥 위쪽과 건물의 앞뒷면 중앙간에는 네 개씩, 다른 기둥 사이에는 두 개씩의 공간포(空間包)를 올렸고, 양 측면에도 두 개씩의 공간포를 올렸으며 내외포(內外包)가 모두 이출목(二出目)이다. 위층에는 기둥 사이의 중방(中枋)과 창방 사이에 작은 창(窓)이 나 있다.

    공포는 외삼출목칠포작(外三出目七包作), 내이출목오포작(內二出目五包作)이고 천장의 가구(架構)는 연등천장이다. 지붕은 아래위층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씌우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를 올려놓았으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머리 모양의 장식)를 올린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최근의 수리 결과, 원래는 팔작지붕이었으며 아래위층의 살미첨차의 하향을 막기 위한 헛공아가 후세의 첨가물임이 밝혀져 제거되었고, 공포 사이의 포벽(包壁)도 토벽(土壁)으로 내외면을 단청하여 연화 또는 당초문 등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후세의 공작임을 알게 되어 제거되었다.

    한편 편액의 필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성문의 예자(禮字)는 오행에 배치하면 불[火]이 되고 오방(五方)에 배치하면 남쪽을 지칭하는 말인데, 다른 문의 편액이 가로쓰임이나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은 숭례의 두 글자가 불꽃 염[炎]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산(火山)에 대하는 것이라 한다.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에 발생한 화재로 숭례문의 2층 누각의 90%가 전소되고, 1층 누각의 10% 미만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기반 석축은 화재사고로부터 안전하였다. 화재 이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숭례문복구공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공사는 약 3년의 기간을 거친뒤 2013년 5월 4일 복구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한국 민족 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다음 백과





    #남지터

     남대문 맞은편 횡단보도건너면 위치해요




    서대문역에 위치한 강북 삼성병원 과 

    도로에     돈의문 터가    표시되어있어요   정동사거리에서 

        돈의문 을 철거하고   도로가났다고합니다  


    지도에는   돈의문  터랴고  나타나는데  돈의문터를  찿는다고  아우성  ㅋㅋㅋㅋ

    세상에 만상에 돈의문터가  어디있느냐고 길가는행인에게 물어보니 

    그련것 모른단다   여기가   서대문이 돈의문 일대 그나마 


     웬  젊은   대학생같은 분에게  ㅋㅋㅋㅋ


    그나머지는  돈의문이 무엇인지 서대문이 무엇인지도 몰랴요 ㅋㅋㅋㅋ

    어느정도  정보를 검색하고  가나   모두들   무관심   푸하하하   

    나중에  벽에   도로에  있는 글 보고서    상황 알게되다    ㅋㅋㅋㅋ





    돈의문 박물관 마을 건물옆에  도로가   작은  돈의문  터  저렇게    벽에   그것도 아래에  부쳐져있어요 

    저처럼 관심 안가지고  서울사람들 신나게 바쁘게움직이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마 지나칠걸요  ㅋㅋㅋㅋ

    표지석이라도  있을거랴고  찿아갔다간 천만의 만만의  콩떡입니다  ㅋㅋㅋㅋ

    표지석도  없고 

    서대문 (돈의문은 )소실  철거  

    돈의터   흔적만   남아 있었어요 

    돈의문   터  간단한 설명서만  벽에붙어있었어요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의문으로 흔히서대문이라고불린다

    최초의돈의 문 1396년  태조5년에  8개의 성문과 함께건설되었으나

    1413년 (태종13년  새로지어진 서전문이 성문의기능을대신하였다

    1422년 (세종 4년 )성문을 다시닫고 이지점에새로운문이세워졌다 

    이후새로운문이라는 뜻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불렷다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유래

    돈의문 일제 강점기  1915년3월  도로   확장 공사를 우해 철거되었다   


    이렇게  깨알같이  적혀있답니다    

    위치는  강북성심병원  도로 길가벽 조그맣게

      바로옆에 길가에 붙어있어요  


    돈의 문 박물관마을 맞은편에요  

    무관심하면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도모르고  지나칠것 같아요   

    옆에두고도    모두무관심하게지나쳐도  모르죠  

    그련것이 어디있느냐는  답변   ,ㅋㅋㅋㅋ


    #서대문 ( 돈의문  성곽길 ) 이었다고 합니다 도심지   아래에  있어요

    지금현재  서대문역  일대가    돈의문  ~~~성곽일대  그리고 

    이정표에  권율장군  집터도  보이고  홍난파   생가도  얼핏본것 같네요  ㅋㅋㅋㅋ

    #설명을 위하여  4대문   4소문을 미리 올려 보았습니다 

    남대문 


     


    남대문  정문앞에서 


    남소문  터를   찿기위해서  남산에  내려와서    헤메기 

    신나게   검색을  해보아도 남소문이  저도  광희문인줄알았는데 

    우리도  남소문터를  찿지못하고 점점멀어지고 지도선상에 나타난것  확인하고

    위로를  삼으면서  남소문터는 지도선상에서 점점멀어지고    광희문을  향해서 

    발길을 돌렸다    실록에도      광희문과 남소문을   구별하지  못하는 신하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하네요 

    다음은 검색한자료입니다 


    남소문은 처음부터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처음에는 도성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 즉 남산골 사람들의 통행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문이었다. 그런데 그 문이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죽자 풍수가들은 음양설을 거론하며 "손방(巽方, 동남쪽)은 왕가의 황천문(皇天門)이다"라는 불길한 말들을 퍼트렸다. 결국 남소문은 지어진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년) 굳게 닫히고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예전에는 남소문이 있었다. 광희문 남쪽, 목멱산 봉대 동쪽에 있었는데, 김안로가 제멋대로 닫았다고 하니, 근거할 바가 없다. 숙종 5년(1679년)에 다시 설치하자고 의논하다가 곧바로 중단되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 편


    광희문 뒷면입니다 

    #광희문

      

    광희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 기록을 보면 남소문과 광희문의 자리를 혼동하기도 하고, 성문 터과 군영의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도성을 수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희문은 도성 수축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숙종 37년(1711)에 중건에 착수하는데, 수구문을 다시 쌓고 아울러 문루도 조성하게 하였다. 수구문은 심하게 파괴되어 석축을 새로 개수하는데 시일이 많이 걸리므로 서대문 지역을 담당하는 아문에 목재를 넘겨 주어 돈의문 문루를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성문이 수축되고 그 이후 언제 문류가 중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숙종 45년(1719)에 수구문은 옛 이름이 광희문이니, 해당 군문에서 액호를 써서 걸 것을 요청하자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영조 때에 도성의 문루가 없는 성문을 중건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에 광희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1759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도>에는 당시 문류유무에 따라 성문을 그렸는데 수구문에는 문루가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광희문은 숙종 때에 재건된 것으로 확인된다.

    광희문은 일제가 전차궤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을 철거할 때도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문루가 파고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 후 1975년에 도로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옮기는 이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75년 11월에 준공되었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병자호란(1636)때에는 임금이 역시 이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하였다. 성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소문과 같이 장방형 무사석으로 높게 축조한 육축을 마련하고 육축 가운데 홍예를 앞뒤로 설치하여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와우  드디어  광희문까지  어렵게  다찿아왔습니다

      우와   한양도성 순성길  각구간을   종주했다는  설레임

    기쁨   충만합니다  저혼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ㅋㅋㅋ

    흔히   수구문  시구문이랴고도  한다고합니다  

    *1396년   태조5년  도성쌓을때  창건 

    *1711년 숙종 37년  고쳐쌓고   

    *1719년  석축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 현판을 걸었다고합니다

    광희문이 남소문인줄 알았는데  남소문 따로   있었나  보네요   

    나중에  남소문 터에서 설명할께요     



    돈의문 터찿아서  3만리~~~ 인왕산 구간   투어했을시

      한며칠전 사진입니다 

    목적지에서   헤메기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갔다가   ㅋㅋㅋㅋㅋ


    김신조 일당  쳐들어와서   군데군데   부대도 설치   했다고  합니다 


    인왕산 구간 좌청룡 우백호  


    해골바위인가요

    선바위인가요 

    아무튼 인왕산에는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많았어요 



    #치마바위   여성의  주름치마처럼

       생겼다고  해서요   (인왕산 구간 )


    도성을 끼고   있는곳을 다돌았나봅니다  때로는  여려명과 

    때로는 저혼자서요   ㅋㅋㅋㅋ믿거나 말거나 

    *6-경복 궁
    *7창덕궁
    *8창경궁.
    *9덕수궁
    *10.경희궁 종묘
    *11청계천

    *12.인사동
    *13.북촌 한옥 마을

    *14.삼청공원
    *15.운현궁 (흥선대원군)
    *16.석파정 (흥선대원군 )별장


    북대문 (정식이름은 유교 사상에 따라 인의 예지랴고 지었으나

    지를넣어 숙지문 하지않고 숙청문 청을넣어 숙청문 그려나 지금은 숙정문

    숙청문은 위치상 거의통행되지 않고 장마가 지면 비그치기를 기원
    영제가 기청제를 거행하였으며

    또 예종때는 가문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에 듣고

      음기서린 북대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 중종이후 모든기록에 숙정문나타나고 있으며 

     새로 복원된 현판에도 숙정문 걸려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닫아두고 비상시만 개방


    (이사진도백악구간을   투어했을대사진입니다  )




    유일하게  가로로 읽는다고   합니다

    현판   고박정희   대통령   필체랴고합니다 

    백악구간을    탐방하실려면   신분증 필히지참

    표찰하셔야입장가능하답니다 

    아그리고  숙정문 창의문 입장하려면  말바위 안내소에서  아니면   창의문 안내소



    #북소문 (창의문 ) =일명 자하문   현판  유일하게    엣모습  그데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광희문  혜화문  남대문 복원

    #창의문  (자하문 )

    전에  찍어둔 사진입니다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가 많이 끼였는가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등치로는 건축면적 49.587m²(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대한민국 구석 구석 (다음백과에서 발췌 )


    혹자는   자아문과  자하문을   착각하시는 분도 계시는데요  

    자아문은  세금정   있는곳에  있는곳    

    자하문은 창의문 애칭으로  많이 불리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참고  하셔요    ㅋㅋㅋㅋㅋ


    자   ~~~~~~~한양도성  4대문   4소문을   잘이해하셨나요 

    걷기가  목적이라도    하나랴도  알게되면   크다란  기쁨  이곘죠   공부해서 남주나 

    물론 급하게 장문을 쓰다보면  오타도 나타나고   정보도  차이가날수도  있어요


    틀리면   알려주셔요  즉시 수정  하겠습니다 

    본론보다  서론이  너무  길었나요  지금부터 저와   함께  

    남산 목멱구간을   가보실래요  고고  




    도심속  사람들은  바쁘게  오가니     한양도성길이  어디 있는지

     아무튼  서소문 터를    찿아가니  

    이련게  나타났어요 

    시위;병 영터



    살아   있는 역사의 길 현장입니다 가다가 보니까  서소문  (소의문 터가  나타났습니다   )

    표지석만  ~~~~

    #소의문 

    *1914년일제의   의해 철거  


    큰도로  끼고  가니   서울한양도성 순성길  남대문 (숭례문 )



    굵직한  굵직한 고층빌딩  들  은행 신문사  ~~~들도 보이고요











    그래도   큰대로  길에      도성길  윤곽이  나타납니다 


    저   ~~~~~~~요즘   한양도성   돌의 성곽의  매력에  빠졌나 봅니다   하하하  ~~~~~~~


    옛시대  돌같기도  하고고요  

    새로운  잘다듬어진  돌 도 나타나고요 


    어딜가나   커피    카페도보이고요  ~~~~~~~~


    삼성  에스원도   나타나고요  오다보니  


    #남대문 이보입니다  

    아   그날도  미세먼지  작렬   안개가   자욱 

       오후까지   하늘이    안보였어요   ㅠㅠㅠㅠ

    남대문  사진은 위에서 미리올렸고요  




    횡단 보도 건너서 남산공원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남산하면 (목멱산) 마뫼등으로 불렸으며 기반암은화강암이다
    *북쪽으로 청와대 뒤로 북악산 하지만 북악산 일본잔제에서 북악산
    실제로 조선시대 ( 백악산 )

    한성서울도성길 가보신분은 이해하기 쉽다 우리는 북악산이 더익숙하죠
    나라없는설움

    *동쪽은 낙산 (낙타모양이라고)
    *서쪽은 인왕산
    청와대는 좌청룡 우백호 길지랴고 합니다

    남산에둘려싸여 청계천 물이흐르고 경복 궁 창덕궁 종묘 그리고한성길4대문 4대문
    *동대문 (흥인지문)
    *서대문 (돈의문)
    *남대문 (숭례문)
    *숙정문 (북대문) 산속깊이있어서
    잘몰라요 하지만 전 다녀왔습니다 곡장까지.ㅋㅋㅋ믿거나말거나
    4소문
    *동소문 홍 화문 (지금의혜화문 창경궁 문하고 헷갈려서)
    *  서 소문 (소의문 소)실

    *남소문 (페쇄   사라지고 )수구문  시구문 

    광희문 복원   남소문 역활 
    *북소문 창의 문 (자하문)
    한문으로 뷹을자 사용 임금님이 있는궁궐



    조선 태조때 능선를따라 한양 도성을축성 외부의 침입을 막기위해서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남산전체 일대가 시립공원

    서울도성 축성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라고 합니다
    4대문 중앙에 보신각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서울한양도읍지 서울을 지켜주는 수호신

    자연산 남산위에 봉화 5개 조선8도 소식을보고 산신령 모시고
    봉수대 국사당

    사진보고 설명할께요

    남산은 벗꽃 그리고 갖가지 꽃들 삼무 삼청 공해가 없고

     전파가 없고 근심이없고 서울시민에게 맑은공기

    제공 자연의 휴식처 꽃구경 산책 볼거리
    케이블카 남산타워 다양한 볼거리 제공
    자물쇠 드라마 촬영지

    다양하며 남산위에 저소나무철갑을두른듯

    소나무가 많았으나 애국가 소절에 나오는

    일본이 많이 베어버리고 아카시아등잡목
    지금은 예쁜꽃 단풍이없지만 한계단한계단 친구들과 오르는길은 또한

    추억~~~
    자 그럼 저와함께 남산 을 올라 가보실래요


    제가  남산을  오르기는  5번채입니다   '

    1맨처음 오르기는  울아들내외의 푸로포즈받고 

    2그리고  동호인들과   이때는 그냥 몇명이서 주르룩   케이블카타고 오르다 

    3남산 벗꽃보려 

    4올해설날연휴 때  친구들34명과   오르다    팔각정까지  

    5,그리고 이번이   5회채    (3명 )


    남산하면 누군가가  서울거주하면  다녀온산 

    아니면   살아도  한번도 안가본산 이랴고 말할것이다 

    누군가  동행하느냐  따라서  길은 다르다 느낌도 다르고 


    계절별 다르고    가장  정도길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이라고하는데

    난   처음이다   ,이게   여행의 묘미가  아닐가싶어요  



    남산 성곽길을  오릅니다 


    성곽  찍었는데 남산 타워가 보이네요 


    아무튼 전    낙산 구간  흥인구간 백악구간  인왕산구간  모두   점찍고 

       마지막으로   남산 목멱구간   숭례문 구간  종주  성공    제자신에게    격려합니다 

    한양도성  박물관 관람 그리고  고궁   모두   다가보다  나중에 가면 또다르겠죠  



    시간약속 철저  항상 집결시간보다    모두들 30분이전   도착     ㅋㅋㅋ

    거의   1.2분  상관 간격으로 동시에 도착   오늘도  나는 걷는다  한양도성길을  정처없이

    유행가 가사처럼요 ㅋㅋㅋㅋㅋ





    신종  바이려스   코로나   인지 무엇인지 때문에    거의    사람들이  없어요   

    샤브쟉 샤브쟉 살뱡샬방  올라갑니다  




    2020년 2.13일 남산 성곽길을다녀오고나서
    다음편도  기대  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