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행복님의 삶

♧서울 한양도성 역사와 의미 ♧

doggya 2020. 2. 15. 20:45

#한양도성 순성길
*백악구간
*낙산구간
*흥인지문구간
*인왕산구간
모두 발도장찍고서 오늘은 남산구간
목표로 하고 올랐다
*숭례문 구간
*남산구간

다음은오르는길에 안내해둔 설명서 안내판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용감했다♧

한양도성 4대문 4소문


1동대문 (흥인지문)
*동소문 (혜화문)

2서대문 (돈의문)소실 강북삼성병옆에 도로가에 표시된글자만
*서소문 (소의문)소실

3남대문 (숭례문)
*남소문 (폐쇄) 시구문 시체가나가는문

광희문 나중에 복원
4북대문 숙정문)
*북소문 (창의문)


서울 한양도성[사적 제10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서울  한양도성  홈페이지서  발췌 


남산을  향해서 올라가니  벽에   한양 도성의  역사와   

사계절풍광 

안내표지판이     있었으나  일일히읽어 볼새도  없이 사진 몇컷담아서 저장하고  이동합니다 




한양도성순성길을투아하면서 여려차례  같은사진을 등록한줄  압니다  

하지만  또다시  공부   해보실래요  


#한양도성의  역사  



*역사를  품다


한양도성에는 한국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한양도성에는 우리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 온 축성기법과 성곽구조를 계승하였으며,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축조 당시의 모습은 물론이고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성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이 처음 완공된 것은 약 620년 전이다. 태조 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 모두 98일 동안 전국 백성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전체 공사구간(총 5만 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이름 붙인 뒤 군현(郡縣)별로 할당하였다. 태조 때 처음 축성할 당시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으나, 세종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 · 개축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하였다.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 · 세종 때에는 구간명 ·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 · 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다.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성문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다.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 · 주택 · 공공건물 · 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한양도성의 중건은 1968년 1·21 사태 직후 숙정문 주변에서 시작되었고 1974년부터 전 구간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일단 훼손된 문화재를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하여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 · 관리 · 활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 총 13.1km(2016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다. 숙정문 · 광희문 · 혜화문을 중건하였지만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하게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시민들의 지혜를 모아야 하며, 축성기술 등 무형의 자산을 제대로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강자육백척이라 새겨진 돌 사진 [ 강자육백척 (崗字六百尺) 각자성석 ]

남산 자유센터 건물 축대에서 ‘강자육백척’이라 새겨진 성돌이 발견되었다. 한양도성의 97개 구간 중 강(崗)자 구간 600척의 시작점이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 각자성석의 원 위치는 알 수 없다. 자유센터를 지으면서 성벽을 헐어 그 석재를 축대 쌓는 데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남산 회현 자락 서울 한양도성 발굴 현장사진 [ 남산 회현 자락 한양도성 발굴 현장 ]

남산의 서북쪽 자락은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며 성벽을 헐어버린 구간이다. 2013년 발굴을 통해 땅에 묻혀있던 성벽의 일부(91m)를 발굴하였다. 태조 때 처음 쌓은 돌과 세종, 숙종 이후 보수하면서 쌓은 돌들이 켜켜이 모습을 드러내 한양도성 600년의 역사를 증언한다

(서울한양도성  홈페이지서 발췌 )






1396년   태조5년  처음으로 도성을 쌓다 






조선의 심장, 한양도성

한양도성(사적 제 10호)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도성이다. 성은 백악 · 인왕 · 목멱(남산) · 낙산을 연결하여 쌓았으며 전체 둘레는 18,127m이다. 태조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년)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여 한양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1396년 1월부터 시작한 축성공사에 동원된 인원 총 118,049명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 총구인구의 4%에 육박하는 인원이었다.

태조 때는 성은 높고 험한 곳은 돌로 쌓고, 낮고 평탄한 곳은 흙으로 쌓아 석축과 토축이 뒤섞여 있었는데, 세종 대에 이르러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쌓았다. 한양성곽 안에는 조선시대 궁궐, 종묘, 사직 등의 왕실건물을 비롯하여 육조 등의 관청건물, 양반과 서민들의 주거지가 정해진 위치에 세워졌다. 출입시설인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 · 보물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총 97구간으로 나누어 2개의 구간마다 관리 12명을 배치하여 감독하게 했으며, 1구간을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을 분리시키는 등 세밀한 계획을 세워 공사를 진행했다. 첫 구간은 천자문의 ‘천(天)’으로 시작하여 97번째인 ‘적(吊)’으로 끝나고 있다.

(국립 중앙 과학 관 성곽 축조 과학관(다음백과)발췌



축조과학

성벽은 세종, 광해군, 숙종,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성벽을 고쳐 쌓았다. 세종 때에는 큰 돌로 아랫부분을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게 쌓았다. 또한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숙종 때는 정사각형의 돌로 가지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을 이루었다. 이러한 축조기술은 지방의 읍성과 산성축조의 모범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어,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600여 년간 조선왕조를 수호하던 한양도성은 개화기에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갔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의 지혜와 합리성으로 빚어낸 한양도성의 가치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나라의 심장으로써 자리매김 하고 있다. 현재에도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게 도성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국립 중앙 과학 관 성곽 축조 과학관(다음백과)발췌



일제강정기의 수난 ,~~~~~~~~~수난의 시작



대강  대강 건성으로 읽어보고 이동합니다 



오관수문 철거   



혜화문루철거    ~~~~~~~~~그려고보니  헤화문  동대문  낙산구간 투어할때  공사를 하고있던생각이납니다 

혜화문 

광희문 루철거 ~~



한양도성의  야경  벽에     붙어있는 사진입니다 



한양도성  멸실 구간

정비구간 

아무튼  한양도성  성곽 거리를  전체를  발도장  남겼습니다



복원되어  이간 수문이 나타났다고합니다 

그전에는  땅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사진으로  확인하셔요 



하지만    동대문 운동장에 대강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발품을   팔면서  지리를 배우고 역사를 배우고   공부해서 남주나  


발굴을  통해서    땅속에서  찿은  한양도성  사진을 찍을때는 몰랐는데 직접  현장답사  

가까이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눈으로 보면서    중간 중간   휴대폰이   밧데리 고갈되어서 

일일히  놓치기도     제폰은    오래된  6년된 구형이라서  분리형 밧데리



그래서 노후에서인지  금방  밧데리가  사진 몇컷담으면사라짐

하긴  분명히 제가 일행들보다  사진을 무작위로  많이 도 찍을것 입니다




성곽을 끼고서    엣날 모습인가요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게 도성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서울  한양도성의   가치와의미 



아무튼  전  한양도성   순성길  모두  종주  한데에 큰의의  느깁니다  ㅋㅋㅋㅋ



숙정문  창의문   구간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표찰  받아야가능

신분증 필히 지참해야 합니다 






4계절  아름답기도하겠죠  

한양도성   대한 설명서   한참동안    안내되어  적혀있었으나대강 이정도 

제가 멈춘곳만  사진을 찍었을 것입니다  






지금  현재서대문역 

강북 삼성병원 



서대문   (돈의문   소실 )



강북  삼성병원과    돈의문 박물관마을 맞은편에    표지석도  없이    표지문도  없이 

길거리  작은   글씨로     적혀있어요  돈의문터는요 


#돈의문터   




그전에    서대문  (돈의 문 성곽길이었다고   합니다    )

그아래로는   홍난파 작곡가   집도  이정표로  본것같네요   ㅋㅋㅋ


서소문 (소의문 )소실  



#이간 수문 

을지로6가 18번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한다.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서울 지명사전에서 발췌 )다음백과 


#오간수문


오간수교  저는    이물줄기가   청계천 제가   늘 빛축제 때가보았던 곳인가  했는데

다리육교가  전혀아니란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시 우물안 개구리  ~~~~~~~~~~~ㅋㅋㅋㅋ





청계천물줄기이긴  하나 그장소가 아니라는것을   이정표보고서   깨달았습니다  ㅋㅋㅋ

가는곳마다  초행길   많이   배우고     알게됩니다 



오간수교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된 5개의 구멍을 만들어 홍예교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다섯 칸의 수문을 설치했다고 하여 오간수다리,오간수문 등으로 불렀으나 성종 12년(1481)까지만 해도 수문이 3개였고 후에 몇 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되었다. 이 수문은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나가거나 혹은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었다. 실제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典獄署를 부수고 도망갈 때에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는 명목으로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하였다가 후에 그 위의 성곽이 훼손되면서 함께 없어졌다

(서울지명사전에서 발췌 )





돈의문 터 찿아서   3만리 ㅋㅋㅋㅋ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으며, 인근의 새문안로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유학1915년에 철거되었다



돈의문   터  간단한 설명서만  벽에붙어있었어요 



돈의문   터  간단한 설명서만  벽에붙어있었어요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의문으로 흔히서대문이라고불린다

최초의돈의 문 1396년  태조5년에  8개으성문과 함께건설되었으나

1413년 (태종13년  새로지어진 서전문이 성문의기능을대신하였다

1422년 (세종 4년 )성문을 다시닫고 이지점에새로운문이세워졌다 

이후새로운문이라는 뜻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불렷다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유래

돈의문 일제 강점기  1915년3월  도로   확장 공사를 우해 철거되었다   


이렇게  깨알같이  적혀있답니다    

위치는  강북성심병원  도로 길가벽 조그맣게

  바로옆에 길가에 붙어있어요  


돈의 문 박물관마을 맞은편에요  

무관심하면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도모르고  지나칠것 같아요   

옆에두고도    모두무관심하게지나쳐도  모르죠  

그련것이 어디있느냐는  답변   ,ㅋㅋㅋㅋ

제가   확대해서   사진찍은것  적어보았습니다   ㅋㅋㅋㅋㅋ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의문으로 흔히서대문이라고불린다

최초의돈의 문 1396년  태조5년에  8개으성문과 함께건설되었으나

1413년 (태종13년  새로지어진 서전문이 성문의기능을대신하였다

1422년 (세종 4년 )성문을 다시닫고 이지점에새로운문이세워졌다 

이후새로운문이라는 뜻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불렷다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유래

돈의문 일제 강점기  1915년3월  도로   확장 공사를 우해 철거되었다   


이렇게  깨알같이  적혀있답니다    

위치는  강북성심병원  도로 길가벽 조그맣게

  바로옆에 길가에 붙어있어요  


돈의 문 박물관마을 맞은편에요  

무관심하면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도모르고  지나칠것 같아요   

옆에두고도    모두무관심하게지나쳐도  모르죠  

그련것이 어디있느냐는  답변   ,ㅋㅋㅋㅋ








자  구경은 잘하셨나요   시청역 9번출구에서 

  서소문터를   찿아서 출발해서   광희문 거쳐서  동대문까지 

완전하게  종주했습니다  

이해를 돕기위해서  여기는 일부만     등록 했습니다 

다음편을 기대  해주셔요   

 

*일행    3명 

리딩해주신  대장님

함께해주신 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을   약속하겠습니다  

2020년    2.13 남산 목멱구간을 다녀오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