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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아트 뮤지엄 - 2. 게이로 오해받았던 고갱과 고흐

doggya 2006. 7. 9. 04:55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처음 보시는 분들께서는 1편에 간단한 뮤지엄의 소개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어제의 모네에 이어서 그럼 오늘은 각별한 우정을 나눈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작뭄들을 둘러 볼까요?

그리고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피에르 르노아르도 함께 만나 보시고요.

 

폴 고갱(Paul Gauguin : 1848-1903)

 

세잔느, 고흐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폴 고갱은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로써 파리에서 태어나 1871년 학교를 마치고 상선(商船)의 선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사망으로 포기하고 증권거래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답니다

 

73년에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 고갱은 동료의 권유로 이른바 <일요화가로서 화필을 들었고, 화랑을 돌아다니면서 당시는 아직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게 됩니다.

 

 

               Wood Tankard and Metal Jug     1880년도의 정물화

 

1876년 그의 풍경화가 살롱에서 입선되어 C. 피사로와 교제하게 되었고, 80년에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려 작품전을 연 후에 직업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는 1883년 이후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게 되지요. 

 

인상파 계열의 섬세한 필촉이  색채를 누비는 듯한 스타일이었던 그의 화풍이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마르티니크섬에서의 생활과 J.F. 밀레·A. 베나르 등과의 교제로 인한 것이라고 후세에서는 얘기들을 하고 있답니다.

 

 

              Why are you angry  왜 화가 났느냐는 제목의 작품 1895-96

 

그러다가 남부 프랑스의 아를에 있던 빈센트 고흐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으나, 고흐의 정신병 발작으로 헤어지고  유럽을 떠나 타히티 섬으로 가서 그 곳의 원주민들의 생활을 그리게 되었지요.

 

 

                              1892년에 완성된 The Burao Tree

 

고갱은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으며, 야만적인 색채와 소묘만이 타히티의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이들을 올바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껴 토착민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때로 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의 것을 묘사하기도 했지요. 

 

 

                             1891년에 완성된 The Big Tree

 

 

                         1903년의 폴리네시안 여인과 아이들

 

 

                                      1894년 신의 날

 

세월이 흐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파리에서 그리는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을거라는 화상들의 반대로 그냥 타히티에 머물게 되는 불우한 말년을 지내지요.

 

다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1853년 3월 30일, 빈센트는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개신교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납니다.

그의 어머니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 윌렘이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고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1855년에는 여동생 안나(Anna가 태어났고, 1857년에 아버지의 이름을 딴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고흐와 일생동안 수백통의 편지를 나누며 그를 후원했던 테오(Theo)입니다.

 

 

                         1899년에 그린 여인상. Madam Routin

 

빈센트의 할아버지와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가 장 오랜 전통의 개신교인 캘빈 교회 목사였으며,  어머니는저명한 왕실 제본사의 딸로서 그림을 잘 그렸고 글 솜씨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고흐는 어머니에게서 재능을 물려 받았나 봅니다.

 

빈센트는 열다섯 살에 가정사정이 어려워지자 학업을 중단하고  1869년 7월 숙부의 권고를 받아 테르스테크가 새로 지점장을 맡은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판화와 복제화를 파는 일을 담당하게 되지요.

 

빈센트는 열성적이고 세심하며 유능한 직원이었고, 칭찬받을 만한 모범 청년이었으며, 규칙적이며 검소하고 독서와 미술과 관람을 즐기는 학구파였다고 합니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면서 형제의 우애가 아주 짙어지게 되지요. 

같은 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전근가게 된 빈센트는 자신이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 이라는 비현실적인 착각에 빠져 첫사랑의 고배를 맛보게 되지요.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ㅉㅉㅉ

그래서  크게 낙담한 빈센트는 결국 영국을 떠나게 됩니다. 

 

 

   1889년에 완성된 자기의 침실, 원근법을 잘 이용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빈센트에게는 심한 우울증이 있었는데,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우리들의 우울 증이나 그 밖의 것은 너무나 예술적인 우리들의 생활 태도에 비롯된 것이며, 숙명적인 유산이기도 하다' 라고 쓰기도 했지요.

 

빈센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리를 몇 잔이나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 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해가 뜨면 질 때까 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독한 압셍트 를 마시고서 창녀를 찾거나 집에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쓰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우울증으로 인한 그의 환청과 환각 증세와 그에 따른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발작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리게 되지요.

 

그러나 그즈음 빈센트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12월 24일, 갑자기 심한 발작증세를 보이더니 1주일 동안 발작상태가 계속되었ㄹ고 그는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다고 하니, 상당히 심각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겠죠.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총상을 입고서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 어가 누웠는데,  곧 의사가 와서 치료를 했지만 외과전문의가 아니었으니...

밤이되자 호흡 곤란이 오면서 '이렇게 죽고 싶어'라고 동생에게 말한후 30분 뒤에 죽었다고 합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반.....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테오는 형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찾았는데..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
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그후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에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으나 33세 의 나이로 죽었ㅏ고 합니다. 그리고 테오의 부인이 생전에 한 작품도 팔지 못한 빈센트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었느데, 그 작품들이 지금 네델란드에 고흐 뮤지엄을 채우고 있답니다. 

 

한첨전에 그 뮤지엄이 내부수리를 할적에 미국에 순회전시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엇어요.

 

고흐의 그림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못 찾겠네요.

다음에 찾으면 보충할께욧. 죄송 ...^_^

 

다름은 르노아르 Pierre Auguste Renoir (1841 ~ 1919)

 

르노아르는 파리에 살면서평범한  파리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그리는데 주력을 한 화가예요.

 

 

                            바느질하는  Jean Renoir, 1898-99

 

 

                                 1881-82년에 완성된 국화꽃

 

 

                            1879년 작품, 발레하는 소녀들

 

 

                                      1879-80, 호수 근처에서

 

 

            1880년인가? 기억이 잘 안네요. 나중에 수정할께요. 죄송

 

 

                                    1875년의 점심먹는 광경

 

 

                              1873년에 완성된 예술가의 집

 

아직도 갈길이 멀거든요.

다름을 기대해 주세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