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지구여행과 체험/시카고

시카고 아트 뮤지엄 - 4. 피카소와 인사하세요 ~

doggya 2006. 7. 12. 06:05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처음 보시는 분들께서는 1편에 간단한 뮤지엄의 소개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피카소 Picasso, Pablo Ruizy(1881-1973)

 

 

 

20세기 최고의 화가 혹은 20세기의 미술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피카소의 이름을 빼고는  단 한 줄의 글도 써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또한 그만큼 피카소에 대한 수없이 많은 글과 책들이 범람하고 있고,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워낙 유명해서 이미 잘 아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냥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단하게 소개를 할게요. 한마디로.....

 

"피카소는 천재다, 그는 미치광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난센스다, 어린애도 그보다 잘 그릴 수 있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다. 그는 호색한이고, 동시에 휴머니스트, 무정부주의자다 "

 

이렇게들 말을 했지요.

 

근세에 들어오면서 사진기의 등장은 그 동안 자연의 모사에 치중했던 화가들에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 되었고, 동시에 사진과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마음속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지요.


특히 보수적인 유럽의 예술계에서 사진이 예술이라는 체제 안으로 진입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1859년  프랑스사진협회의 노력으로 샹젤리에 궁에서 열렸던 '사진 살롱 개최'가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사진의 예술성을 제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예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이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였고, 1862년에는 앵그르를 비롯한 유명 미술가들이 사진의 예술편입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고 해요.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된 것이 근대 미술사에 큰 전환점이 된거라고 볼 수 가 있죠.

 

이러한 일들은 피카소가 등장하기 직전인 19세기의 일이었는데,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행했던 것이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피카소는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것이예요.

 

그의 이런 혁명적 활동은 단순히 화풍(양식)의 변화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고,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해서 여러가지 방법들을 동원한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내는 능력이 미술의 문제가 되었는데,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그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거예요.

 

 

                                         1952년 작품, 무제

 

1881년  10월25일, 스페인의 말라가시 프라스라 메르세드 에서   말라가시 산 텔모 공예학교의 미술교사인 아버지 돈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와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릴때 자기가 쓴 일기에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아버지가 어린 피카소의 재능에 놀라 이후부터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아들의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고 하니, 그런 아버지가 또 어디 있을까요

 

 

                                    1906년의 작품인 누드와 물병

 

93세의 나이로 1973년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둘때까지 파블로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으며, 또한 무신론자였다고 해요.

 

피카소가 1900년 파리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미술의 천재가 프랑스의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혁명을 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죠.

 

 

                              1901년의 미친여자와 고양이


피카소는 1904년에 몽마르트의 바토 라브와르에 정착하고, 1907년에는 큐비즘의 발판이 되는 중요한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제작하게 되는데, 그는 동요하던 20세기초 미술의 주역들과 친분을 맺게 되며, 그 중에서도 특히 브라크와는 함께 작업하고 경쟁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1936년 스페인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곧 공화파에 가담했고, <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게 되지요.

 

 

              1906년에 피카소와 교분을 나누던 브라크가 그린 Antibery

 

 

                              1903-04년의 늙은 기타수

 

이 작품은 피카소가 그레코에 심취하던 때였는데, 굶주리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성자의 그늘이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해요.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인체는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손가락도 뼈만이 앙상한 것이 특징이죠.

 

이 손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이지만, 기타는 노인의 신체의 일부처럼 달라붙어있고, 또  노인은 장님이었기 때문ㅇ[ 그를 둘러싼 세계와는 이미 창문을 잃어버린, 이  밀폐된 상태의 사나이의 조형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지 않나요?

 

 

                            피카소의 나이 78세때에 그린 소나무 아래의 나부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나부를 풍경 속에 배치하고 있는데, 나부의 육체의 선은 배경의 언덕의 선과 하나로 되어 있어요.

또한 소나무 가지는 화면 오른쪽 앞에 푸른 그늘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나무는 대지 그것인 양 엷은 갈색인데, 여기서 피카소는 '대지=어머니' 라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을거예요. 

 

 

                                         1905년의 조각품               

 

    1901년의 on the Deck, 아직 이때까지만 해도 후기 인상파풍의 그림을 그렸었지요.

 

 

                                    1909년의 여자의 머리

 

 

                               1910년의 다니엘 해리

 

 

                                        1911-012  유리

 

 

                                      1906년의 여인의 반나

 

 

                                           1931년의 빨간의자

 

 

                                              1922년의 정물

 

 

1921년의 모자, 원래는 왼쪽으로 멀리서 아버지가 지켜보는 그림이 있었는데, 잘라버리고 모자만 남겨둔것이랍니다.

 

 

 

1965년에 시카고에 시청을 새로 지을때 시청앞 광장에 세우기 위해서 만든 조각품의 원본이고, 큰 작품은 시청앞에 전시돼 있지요.

전에 시카고를 소개할대 보여드렸거든요. 

 

 

                     정확한 연대가 까리까리 하네요. 죄송

 

 

                                        1927년 작품인 머리

 

 

피카소와 같이 스페인에서 출생한 화가 크리스가 1912년에 그린 피카소의 머리

 

 

                                            1930년의 구성

 

 

대강 피카소의 작품들을 구경하셨죠?

다음엔 누구 차례가 될까요.

궁금하시면 다시 들러 주세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