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음악들/클래식 음악

베토벤 교향곡 7번 A장조 op. 92

doggya 2018. 4. 27. 06:56


베토벤 교향곡 7번 A장조 op. 92

Symphony No. 7 in A major op. 92



자극적이고 광란에 넘치며 흥분시키는 베토벤 교향곡 7번..

Symphony No. 7 in A major [작품 구성]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도입부 전체 관현악의 투티(f)로 시작되서 침착하게 pp로 상승하는 음계가 길게 이어지다 크리센도 되면서 최초의 관현악 폭발은 ff로 이뤄진다. 이어 오보에에 의한 노래이후 다시금 관현악은 ff로 폭발하고 이를 수반한 현의 상승은 관들의 sf로 장식되어진다. 뒤이어 비바체의 도입부 역할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제시부 - 제 1주제 플룻과 오보에에 의해 1악장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리듬이 제시되고 곧이어 플룻이 경쾌한 제 1주제를 노래한다 . 목관에서 바이올린으로 주제가 옮겨지면서 이내 ff로 금관과 팀파니가 참여하여 호른과 바이올린은 제 1주제를 트럼펫과 팀파니및 저음현은 리듬을 노래한다 . 이후 미쳐서 날뛰는 듯한 양상이 되어 간다.
- 제 2주제 플룻과 제 1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제 2주제 역시 역동적인 것이다. 곧이어 겹8분 음표들로 구성된 리듬 부분을 거친후 클라리넷-바순-오보에-플룻으로 이어지는 크리센도후 ff로 종결부로 이어진다.
- 종결부 관악기와 팀파니에 의해 앞서 언급한 그 리듬을 ff로 계속 연주하다 제 1주제에 맞춰 신경질적으로 거듭되는 ff로 제시부를 맺는다. 이 제시부는 악보에는 반복표시되어있으나 70년대 이전 녹음들은 대부분 반복은 생략한다.

전개부 앞의 리듬을 철저히 되풀이하면서 발전되어나가다가 254째 마디에서 트럼펫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클라이막스를 만든후 현에 의해 추스러진다음 재현부로 이어진다.

재현부 제 1주제와 제 2주제를 충실히 재현한 후 다시 1악장의 리듬에 의한 강한 클라이막스를 ff로 만든 후 p로 음량을 갑자기 줄인 후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 주요 리듬과 제 1주제로 장쾌한 코다를 만든후 화려하고 통쾌하게 끝을 맺는다.

◆제 2악장 Allegretto 


제 1 주제부 목관부가 2마디를 화음으로 울려 안정감을 준뒤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끌리는 듯한 주제를 제시한다. 곧 애수를 띈 이 주제 위에 비올라와 첼로가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한다 . 이후 이 두가지 흐름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목관도 참가하야 크리센도 되다가 금관과 팀파니가 ff로 참가하고 클라이막스를 이룬 후 점점 여리게 잦아든다.
제 2주제부 클라리넷과 바순에 의한 온순한 선율이 제 2주제를 담당하고 현이 크리센도로 참가하면서 금관과 목관이 ff로 주고 받으면서 제 1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제 1주제부 (푸가에 의한 작은 전개부 붙임) 앞서의 제 1주제와 선율이 동시에 나타난다.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으로 푸가토풍으로 발전되며 수를 늘려가다 끝에 ff로 투티하고는 종결부로 들어간다.
제 2주제부 (재현) 종결부는 제 2주제부를 재현되다가 코다부분으로 발전된다.
제 1주제부 (최후 제시) 제 1주제를 최후로 들려주면서 마친다.

◆제 3악장 Presto


스케르초 주제 갑자기 f로 떨쳐버리듯 거칠게 되풀이 되다가 p로 급변한 주제로 시작된다. 곧 크리센도 되어 ff로 금관과 팀파니가 동시에 사분음표 9개의 리듬을 빠르게 반복하면서 시원한 분위기를 만든후 사분음표 3개의 리듬을 확인시키면서 트리오로 넘어간다. 스케르초를 반복하도록 지시되어있으나 역시 1악장의 제시부처럼 반복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트리오 트리오는 템포가 느려지면서 클라리넷이 노래하는 선율을 기초로하고 있다. 후반부의 큰 클라이막스 이후 다시 스케르초로 넘어간다가 다음과 같이 트리오를 거쳐 다시 스케르초로 돌아온다.
스케르초 주제-재현 트리오 재현-스케르초 주제 반복 후반부에는 프레스토로된 4마디의 ff부분이 종지의 화음을 4번 울린 후 이내 끝난다.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제시부 먼저 강하게 4악장의 주제 리듬을 제시해본 후 총휴지, 다시 이를 반복한 후 미친 듯한 제 1주제로 돌입한다. - 제 1주제 바이올린에 의한 제 1주제는 약박에 sf가 표시되어 있고 이와 함께 sf로 관악기들이 강하게 찔러준 다음 관에 의해 4악장 주제 리듬이 제시된다 . 이 리듬은 곧 금관과 팀파니를 위주로 반복해서 강조된다.
- 제 2주제 f로 끝맺은 제 1주제부에 이어 단조로 전조된 제 2주제가 바이올린에 의해 제시된다.
- 종결부 ff로 모든 관악기들이 거침없이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가면서 4악장의 주제 리듬을 강하게 반복하면서 전개부로 넘어간다.

전개부 전개부는 제 1주제를 중심으로 발전되어져 있고 역시 주제 리듬을 강하게 반복하면서 재현부로 넘어간다.

재현부 재현부에서 제 1주제와 제 2주제를 재현한후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 코다는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선율을 주고 받는 가운데 팀파니와 트럼펫이 f로 찔러주면서 점점 긴장을 고조시켜 나가다가 ff로 일단계 폭발이후 결국 fff로 최고조에 이른후 다시 크리센도를 거쳐 두번째 fff로 이어진다. 곧 ff로 모든 관현악의 투티로 장대하게 끝마친다.



Beethoven Symphnies

작품 배경 및 해설

이 곡은 1811년 가을부터 작곡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5월 완성되었다. 그 전 교향곡인 6번(1808년 완성) 작곡 이후 3년 이상 교향곡 작곡에서 멀어져 있던 셈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변화를 겪게된다. 먼저 1809년 5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이 빈을 피해 도망을 가 베토벤은 재정적 후원을 받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창작이 생각되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해 11월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가 다시금 연금을 받을 수 있게되고 건강도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1809년 무렵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라는 대지주의 딸을 알게된다. 1810년 베토벤은 테레제를 위해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 하였는데, 이 둘의 관계는 20살이 넘는 나이차이 등으로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1811년에 접어들어 베토벤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위해 온천이 있는 테프리츠로 간다. 이 곳에서 안정을 되찾은 베토벤은 다음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은 테프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교향곡 7번 작곡에 반영되었다. 사실 1811-1812년의 작품은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밝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베토벤은 일찌기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술의 신)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해준다"
라고 했다하는데 그의 수많은 걸작중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그의 7번 교향곡이다. 정말로 곡을 듣고 있노라면 예외없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또한 술에 취했을 때마냥 용기에 넘치는 힘을 느끼게 해주는 불가사의한 곡이다. 이곡의 1, 4악장을 가르켜 베토벤이 술에 취해서 작곡된 것이 아닌가 하고 훗날 슈만의 아내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가 비꼬았다고 하는 데 이는 '술은 나쁜 것이다'라는 말이 틀리듯이 어리석은 비평이 아닐 수 없다. 이말을 돌리면 건강한 취기를 용납할 수 없는 앞뒤로 꽉 막힌 분이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예측은 가능하다.

리스트가 이곡을 가르켜 ["리듬의 화신"이라 했고,]교향곡 7번에 대해 바그너는 [춤의 성화(聖化)]라고 하면서 밝고 명쾌한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였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의 주장에 대한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교향곡 3번이 귓병에 대한 절망을 떨치고, 5번이 바깥 세상으로부터 느낀 실망감에서 작곡하였다면, 7번은 전쟁과 실연을 극복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곡과 초연

베토벤의 스케치 북에 의하면 제 7번 교향곡은 늦어도 1811년에 착수된 듯하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12년에 들어와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제 2악장의 스케치는 이보다 앞선 1806년 현악사중주 작품 59-3의 작곡중에 발견된다는데 아마도 처음엔 이 현악사중주에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이 곡의 완성은 1812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현재 베를린의 므로시아 국립 도서관에 있는 자필 악보의 표지에
[7 Symphonie 1812 ... 13 ten]
이라고 적혀있는데 몇월인지는 파손 때문에 알 수 없지만 5월 13일인 것으로 추리된다. 베토벤은 1813년 2월에 공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비공개의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빈의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8번 교향곡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메트로놈을 발명한 멜첼이 주최한 <하나우 전쟁 상이용사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공개초연되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소위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우는 <빅토리아 회전과 웰링턴의 승리> op. 91과 교향곡 8번 op. 93도 같이 초연되었다. 연주회의 성격상 애국적인 기세가 높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교향곡 7번보다 <전쟁 교향곡>이 더 큰 인기를 받긴 했지만 7번도 대호평이었으며 선율이 아름다운 제 2악장은 앙콜을 받기까지 했다. <전쟁 교향곡>과 교향곡 7이 너무 인기가 높아서 결국 4일 뒤인 12월 12일에 재연되고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계속 연주회가 열렸으며 그 때마다 제 2악장은 앙콜되었다고 한다. 초연부터 대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이 곡의 대중성을 그대로 들어내보이는 것으로 한번만 들어도 귀에 곧 익숙해지는 악상 (2악장)과 함께 베토벤 특유의 넘치는 위트 (3악장)와 무엇보다도 광란에 넘치는 1악장과 4악장의 매력이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작품 구성

작곡: 1811년 가을 ~1812년 5월쯤
비공개초연 : 1813년 4월 20일 빈의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8번 교향곡과 함께... 공개초연 :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메트로놈을 발명한 멜첼이 주최한 편성: 편성: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현악 5부
.
Herbert von Karajan(1908 - 1989)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눈을 감고 지휘하는 카라얀의 전형적인 모습


그토록 오랜 동안 기다리던 지휘자로서의 활동이 허락되었기에 1948년이후 카라얀은 정력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카라얀은 빈 필에 가려있던 빈 심포니를 맡아 1953년까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육성한다. 1948년과 이듬해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1949년에는 루체른 국제 음악제에도 참석한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1957년까지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출연하지 않고 빈 필과도 관계가 끊긴다. 카라얀을 경원시 하던 연로한 푸르트벵글러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쫓겨난 카라얀은 바이로이트로 옮겨간다. 1950년 여름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서 1951년에는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와 "니벨룽의 반지"를, 1952년에는 빌란트 바그너가 연출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한다. 그러나 이 공연이 바이로이트로와의 빠른 결별을 부른다. 연출가 빌란트 바그너와의 비낭만적인 신연출에 카라얀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1954년 11월 푸르트벵글러가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드디어 카라얀에게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기회가 왔다. 푸르트벵글러 생전에 베를린 필은 그와 함께 독일의 문화사절단의 자격으로 미국 투어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결국 카라얀에게 그 기회가 주어지고 카라얀은 이를 무기로 삼아 종신 지휘자로서의 계약을 맺어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11월 13일 베를린 필은 만장일치로 카라얀 찬성의 뜻을 표명한다. 정식 계약은 성공적인 미국 투어후 1956년 4월에 맺어진다. 카라얀으로서는 남은 인생 전체가 보장되는 중요한 계약이었다. 바로 이듬해 학생시절 숙부덕에 많은 명지휘자들의 연주를 접할 수 있었던 빈 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된다. 그는 이미 빈 악우협회의 종신 콘서트 감독이었기 때문에 지휘자로서 유럽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1958년 카라얀은 모델 출신 금발의 프랑스 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번째로 결혼한다. 무레는 카라얀에게 두 딸을 낳아주고 마지막까지 그의 아내로 남는다. 1959년부터는 카라얀/베를린 필이 DG와 레코딩 계약을 맺고 녹음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1963년에는 전쟁으로 파괴됐던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카라얀의 입김에 의해 마치 서커스장을 연상시키는 지휘자가 가장 부각되는 모양의 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빈에서의 그의 권력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빈이란 도시가 가지는 특수성도 있었고 카라얀의 자기 중심적인 극장운영에도 문제가 있어서 카라얀과 빈 국립가극장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결국 8년만인 1964년 빈 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직을 내놓면서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겠다는 선언을 한 후 빈을 떠난다. 빈을 떠난 후 카라얀은 본격적으로 레코딩및 영상물 제작에 정열을 기울인다. 레코드와 영상물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남고 싶어했던 카라얀은 스테레오 (60년대), 4채널 (70년대), 디지탈 (80년대)와 같이 음향 기술과 나란히 반복 녹음을 행하면서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연주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는 카라얀이 빈을 떠나자 쌍 손을 들고 그를 환영한다.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정열이 집중되면서 4년뒤 카라얀 자신이 모든 음악과 연출을 감독하는 자신과 베를린 필에 의한 음악제,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를 바그너의 "발퀴레"를 시작으로 탄생시킨다. 마치 바그너가 그의 작품을 위해 바이로이트 축제를 만들었듯이 카라얀은 그가 꿈꾸어오던 바그너 작품의 공연을 위해 부활제 음악제를 만든 것이다. 이는 그가 남은 여생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열심이었던 레코딩 작업들도 이 축제를 위한 자금원으로 쓰였고 레코딩은 축제가 행해지기 전에 완벽한 리허설 차원에서 공연에 앞서 행해졌다. 카라얀의 이런 선녹음 후공연의 패턴은 그후 계속된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차례차례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에 올린 카라얀은 1970년에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그 후 계속해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이스터징거", "로엔그린"등을 다루었다. 이때가 그의 경력에 가장 높은 정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