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adimir Devyatov (블라디미르 디뱌토프) 러시아
러시아 연방 공훈 예술가, 블라디미르 디뱌토프는?
그는 1955년 3월 15일 모스크바의 한 군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런 가풍에 따라 정규 학교 과정을 마치고서도 계속 국방 관련 기관에서 근무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디뱌토프는 어렸을 때부터 또 다른 재능 즉, 아코디언 연주와 성악-기악 앙상블 활동을 통해 음악적인 재능을 키워 나갔으며, 60~70년대 세상을 들썩였던 최고의 그룹인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의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 소비에트 음악계에는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전통적인 음악에 현대적인 리듬과 연주법을 도입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많은 음악가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류 가운데 그네신 음악 교육 대학(지금의 러시아 음악 아카데미)의 전통음악 성악부에는 블라디미르 디뱌토프의 러시아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때부터 블라디미르 디뱌토프의 새로운 음악 활동이 시작된다.
그가 탄탄하게 음악적 기초를 다지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뛰어난 스승 류드밀라 바실리예브나 샤미나와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이 젊은 가수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적인 기법을 익히게 했고 직업적 예술가의 길을 걷게 했으며 때론 막역한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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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디뱌토프의 성공과 명성은 비교적 일찍 찾아왔다.
대학 2학년 때인 1985년 그는 러시아 선율(Russian Tunes)이라는 러시아 전통 기악 앙상블을 결성하였으며, 성악 독창자로서 많은 음악 콩쿠르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러한 화려한 수상 경력은 러시아 음악사에서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특히 1995년 이탈리아의 산마리노 국제 아카데미에서 명예 예술 박사의 명칭을 부여 받으면서, 그는 국제적으로 재능을 인정 받음과 동시에 러시아 전통 음악계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아울러 같은 해에는 러시아 연방 공훈 예술가의 칭호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10여 년간의 그의 예술 활동을 국가가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기간에 그는 앙상블 러시아 선율과 함께 러시아 연방 전역을 순회 공연했으며, 그 외 각종 권위 있는 무대와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등의 유럽 국가에서 러시아 민요와 로망스를 부르며 수많은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수많은 공연들이 러시아의 주요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러시아 전역으로 방송되었으며, 주요 언론들도 그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 기간에 디뱌토프는 주옥 같은 러시아 민요와 로망스를 수록한 두 장의 음반을 발표하게 된다.
특히, 1995년~1996년 사이에 러시아 공훈 가수로서 블라디미르 디뱌토프는 러시아 민요와 로망스를 자신만의 고유한 창법으로 뛰어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실상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러시아 음악 무대에서 그의 자리는 확고했다. 그러나 이것이 한 가수에게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된 그는 1997년에 두 장의 음반을 출시하면서 새로운 모색의 길에 들어선다. 하나의 음반은 순수 고전성을 보존하면서 전통적인 기법으로 노래를 불러 이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했다.
또 다른 음반은 새롭고 신중한 변화의 모색으로 러시아 민요와 로망스를 새롭게 편곡해서 불렀다. 현대적인 녹음기술과 팝송 풍의 기교로 보다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다. 후자의 시도는 시장성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고, 한계에 이른 고정된 수의 청취자 층을 보다 폭넓게 확보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옛 음악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시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그의 이러한 방향 선회와 시도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리하여 1998년 봄과 여름에는 라디오의 다양한 채널에서 그가 부른 곡들이 끊임없이 방송되면서 대인기를 누렸고 이러한 곡들을 다시 모아서 1999년에는 새 음반을 출시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변화의 시도가 열매를 맺어 가면서 디뱌토프가 대표로 있는 전문 성악 학교는 다른 일반 음악 학교와는 차별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진지한 그의 창작적 시도는 로망스에서부터 오페라 아리아에 이를 정도로 폭이 넓었으며, 1996년 말부터는 러시아의 고전 음악 작곡가 글린카, 차이콥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라흐마니노프의 로망스들을 편곡해 불렀다.
오페라 가수들이 민요를 부르는 경우는 있지만, 민요 가수가 오페라를 부른 경우는 아마 유일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위험한 실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적 의지와 시도는 선진적인 것이였다. 이런 면에서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추구하는 훌륭한 아티스트인 것이다.
수준 높은 청중들은 그의 이러한 새로운 시도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그 결과로 만들어진 작품들을 들으며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1998년 9월에 그는 처음으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무대에 섰고, 1999년 3월에는 '데몬', 이후 계속적으로 다른 작품에 참여해 왔다.
2002년 3월엔 처음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에서 독창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 디뱌토프는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많은 시간과 힘을 쏟고 있다. 1995년에 문화예술센터를 건립했고 이러한 취지가 모스크바 시(市)에 의해 지원을 받은 이후 러시아 문화부의 연방 기획안 문화와 예술의 보존과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업에는 음악 학교 건립, 다양한 공연과 콩쿠르, 페스티발, 예술 엑스포의 개최 등이 있으며 특히, 블리디미르 디뱌토프 장학회의 설립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디뱌토프의 또 다른 재능의 자원이다.
이러한 그의 창작과 사회 활동에 대한 업적은 백과사전 1985년~1997년의 러시아 현대정치사('러시아 인물' 2권, 모스크바,1998년) 에 수록될 정도로 유명한 것이다.
대중 매체에서도 그를 오페라 가수로서 그리고 민요와 로망스를 팝송 풍으로 부른 대표적인 스타로 평가해 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제껏 그가 누렸던 성공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적인 그의 성공은 미래의 것이며 21세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그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