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에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0 번 사장조
Piano Sonata No.10 in G major, Op.14-2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반 베토벤) 독일의 작곡가 (1770.12.16 본 - 1827.3.26 빈)
피아노 소나타 제10번 사장조 Piano Sonata No.10 in G major, Op.14-2
이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간단한 것의 하나로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곡조로 되어 있어, 초심자의 교재로 많이 쓰인다. 신들러는 '작품 14의 소나타 2곡에는 두 주의가 서로 겨루고 있어, 마치 남녀가 대화를 하는 것과 같다'라고 쓰고, 다시 말을 이어 '특히 제 2번의 곡에는 그 대화가 한층 명료하게 드러나 있어 두 성부의 대립은 제 1번에 비하여 보다 명백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제 1악장 제 1주제 등에 그 느낌이 뚜렷하다. 악장의 수는 제1번과 마찬가지로 3악장이고, 제 3악장이 론도 형식의 스케르초로 되어있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된 베에토벤이 피아노에 귀를대고 소리를 들으려는 모습 영화'불멸의 연인'중에서
Beethoven, Ludwig van(1770.12.17~1827.3.26)의 생애--(9)
입 신
이 모든 시기동안 베에토벤은 모짜르트처럼 공직의 혜택 없이 자신을 영위해 나갔는데, 그를 도와 줄 가족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모짜르트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오스트리아와 외국 모두에서 점차 치솟아 올라갔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저널이었던 라이프찌히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일반 음악 신문)'의 비평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례함을 트집잡는 일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찬사를 보냄으로써, 인세 제도를 뒷받침할 어떤 저작권법도 아직 마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에토벤은 그를 앞서간 하이든이나 모짜르트,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슈베르트보다도 훨씬 더 유리하게 출판업자들과 흥정을 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 따른 비인 사람들의 음악 생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베에토벤은 그의 가장 야심찬 작품들을 공연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았는데, 이는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같은 후원자들의 후의에 힘입은 바 크며, 공작은 한편으로 그에게 일년에 600 플로린의 연금을 정기적으로 제공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작품의 헌정을 받은 댓가로 후하게 돈을 내곤 하였는데, 이를테면 4번 교향곡의 헌정을 받은 오페르스도르프(Opersdorf) 백작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베에토벤의 학생 가운데는 황제의 막내 동생인 루돌프(Rudolf) 대공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가난은 결코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에토벤과 비인 음악가들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갔는데, 이들의 협조가 베에토벤에게 절실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이는 의심할 나위 없이 점점 귀가 멀어가는 증상으로 인한 것이며, 이러한 상황이 툭 하면 참지 못하고 공격을 가하는 베에토벤 자신의 습관적인 성마름과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그리고 1808년 제 5번 교향곡과 제 6번 교향곡이 작품 80의 합창 환상곡과 함께 초연된 음악회에서 베에토벤이 비인을 영원히 떠날 고려까지 하게 되는 심한 다툼이 일어났다.
베에토벤이 떠나겠다는 협박은 그의 후원자들을 자극하여 이를 막을 조치를 취하도록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루돌프 대공, 로프코비츠 공작, 그리고 킨스키(Kinsky) 백작 등이 연대하여 베에토벤에게 연간 4천 플로린의 연금을 제공하기로 하였으며, 이에 따른 조건은 오직 베에토벤이 비인에 머물러 작곡을 하는 것이었다. 상황에 따른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 계약은 베에토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켜졌다. 그렇게 영향을 끼친 상황 가운데 하나는 1811년에 단행된 통화개혁이었으며, 이 때 모든 지폐의 가치가 4/5로 절하되었다. 비록 루돌프 대공은 이에 따라 지급액을 인상하여 주었으나, 그의 동료들이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은 약간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이런 저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베에토벤은 1809년 이후로는 적정한 수입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의 생활 습관으로 인해 그를 방문한 사람들이 그가 가여울 정도로 가난하다는 인상을 종종 받은 사실은 또 다른 문제이다. 필연적으로,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점차 드물어갔다.
(계속...)
그의 작품은 보통 3기로 나누는데, 간단하게 설명하면
[제1기 1786~1803] 초기의 작품으로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때다. 교향곡 제1,2번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제2기 1804~1816]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독창적인 시기이다. 교향곡 제3번에서 제8번까지의 작품이다.
[제3기 1817~1827] 초인간적인 최고의 예술인데 영감의 창작기이다. 청각을 거의 잃어버린 이후의 감각을 초월한 시대의 작품을 보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9번 등이 있는데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음악사상 최고에 속한다.베토벤이야말로 많은 유산을 우리 인류에게 남겼다고하겠습니다.
베에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전32곡)
베토벤은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이것은 건반악기를 위해 작곡된 음악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위대한 유산이다. 비록 최만년에 소나타를 작곡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피아노 소나타는 베토벤의 전생애에 걸친 작곡양식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32곡의 소나타 중 어느 한 곡도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 곡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세 곡은 '3대 소나타'라고 불리는 8번과 14번, 그리고 23번이다. 이들은 각각 '비창', '월광', '열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8번을 제외하고는 작곡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붙여진 이름이며 상업적인 냄새도 풍기고 있지만 이렇게 훌륭한 곡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베토벤을 진정한 낭만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근거는 평생동안 끊임없이 추구한 새로운 양식에의 시도에 있다. 교향곡에 스케르초를 도입한 것이라든가, 5번 교향곡에서 같은 리듬의 주제를 전곡에 걸쳐 집요하게 다루는 모습과, 주제를 전개시키고 발전시키는 천재적인 솜씨, 피날레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스케르쪼의 동기, 합창을 도입한 교향곡, 3번 교향곡의 피날레에 등장한 대규모의 변주, 독주악기의 카덴짜로 시작하는 협주곡등등, 그가 시도한 새로운 양식은 수도 없을 정도이다. 피아노 소나타도 예외가 아니어서 '3대 소나타'라고 불리는 소나타들 중 정형적인 소나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23번 하나 뿐이며, 8번과 14번에는 당시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Wilhelm Backhaus(빌헬름 박하우스, 1884~1969)
라이프치히에서 정통 독일계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그는 7세 때인 1891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대 중반의 이른 나이로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1899년부터 당시 큰 스케일과 유명했던 위대한 피아니스트 오이겐 달베르트를 사사하게 되었다.
그에게서 베토벤에 대한 해석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훗날 ‘기교파 박하우스’가 아닌 ‘예술가 박하우스’로 완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0년 16세의 나이로 런던에 데뷔했고, 이듬해 아르투르 니키쉬 지휘의 라이 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20세기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피아노를 포효하게 하는 연주를 선보이며 유럽 각지를 누볐다. 그는 만년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이후에는 녹음에 집착해 데카 레이블에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이는 독일음악 팬들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남긴 음반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의 녹음일 것이다.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연주로 50년대에 녹음된 이 전집 중에는 역시 1959년 녹음된 5번 ‘황제’가 가장 유명하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은 1950년대 초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9년까지 녹음된 것이다. 칼 뵘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위대한 명반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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