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평화님의 선물

여름, 종묘풍경

doggya 2013. 4. 27. 22:03


여름, 종묘풍경 / 김진학


몇 개의 고무 징을 놓고 구두 굽을 갈아주는 노인이 있는 그곳엔 나뭇잎들이 술렁인다
병에 냉커피를 담아 파는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며 교태를 부리는 여자가 있거나 잔치국수
한 그릇이 걸린 내기장기의 똑딱이는 소리가 차라리 쓸쓸하다 골목 앞에는 젊은 나이에
죽어간 돼지발목이 가마솥에 삶겨 소주안주로 나오고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담벼락에 서서 깊은 입맞춤을 하는 교복 입은 한 쌍을 지난 더운 바람이 아무리 후회해도
갈 수 없는 회한(悔恨)의 시간들 위로 야위어 간다 날마다 똑같은 소리로 떠들어대는
약장수의 쉰 마이크 목소리에 속는 줄 알면서도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는
고목(古木)을 닮은 사람들, 나무엔 화려한 계절이 떨어지고 얼굴들마다 새겨진 골짜기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세우던 노인이 꽁초를 주워 불을 붙인다

심한 체증에 걸린 나라의 이야기가 나무아래 전염병처럼 돌고 있을 즈음 점심 한 끼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사이로 날아온 늙은 비둘기의 회색 꿈이 히죽히죽 웃으며 쓰러진
젊은 노숙자 위로 걸어가고 있었다


2005년 여름, 종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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