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평화님의 선물

춘자

doggya 2016. 4. 4. 10:47

춘자 / 김진학

부엌 한 쪽에서 이밥 한 그릇
배불리먹은 춘자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우물가로 간다
나는 걸어가는 춘자  옆의
감나무만 바라 보았다
지랄 맞게도 열리라는 감은
안 열리고 잎만 무성하다

물동이 이고 오는
춘자 배가 앞산 만하다
개뿔이나 애를 뱄나 
보름달을 뱄나

달달달달... 툭...
어무이 재봉틀 소리가 멎고
남의 집을 제 집같이 쓰는
춘자가 평상에 눕자
보름달이 춘자 배를 본다
생긴 건 그렇다 치고
얼굴도 두껍다
춘자가 피워놓은
모깃불 연기가
게으르게 하늘로 오른다

안방 문이 열리고
보따리 하나가 춘자 옆에
놓인다
"산모는  잘 묵어야 한데이..."
안 봐도 뻔한 미역과 조기와
아버지가 사오신 사과와
감귤 그리고 소고기 한 근일게다
이런, 남이 안 밴 애를 뱄나

춘자가 자는 체 하다가
실눈을 뜨고 본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아기는
제발 춘자만
안 닮기를

내 곁에 오신
어무이의 조용한 귓속말
"춘자 일어나면 저 보따리
집까지 들어다 줘라"
"춘자는 손이 없는교 발이 없는교
와  이런거 내 한태 시키는 데요?"
"누부야 보고 춘자가 뭐고,
니 보다 열 살은 더 묵었을 끼다."

어무이가 안방에 들어가시기 무섭게
일어난 춘자가 보따리를 들고
삽살개보다 빠는 걸음으로
대문 밖으로 사라진다
애 밴 여자가 무슨
달리기 선수 같다

춘자가 사라진 평상엔
춘자 배만한 보름달이
춘자 대신에 자리를 편다

 

* 2004년 문학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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