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행복님의 삶

국립경주박물관 관람 2

doggya 2018. 4. 14. 16:27

국립경주 박물관 관람

신라천년의 수도 경주에 위치하고있는
경주 국립박물관 구경해보실래요
원래 박물관은 수박겉핡기 식으로

보더라도 일부분만 1시간내에 끝낼수도 있고 하루종일 보아도 다 볼수없는게
박물관 날 잡아서 서울시내 박물관

투어해볼까나 ㅋㅋㅋㅋ나랑 동행할사람
없나요~???귀추가 주목됩니다
국립경주 박물관을 저와함께

구경해보실래요 동선은 제가 이동한곳
꺼죽데기만 보여 드릴께요
신라의 문화 1945년 출발하여 1975년

현재위치로 이전 하였다고 합니다
유네스코 가지정한 경주문화유산 유적지구 신라의 귱궐터 월성과월지

한국불교 미술 보고인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상설 전시관의로는 신라 역사관 신라 미술관 월지관 3관이

이있고 특별전시관 옥외전시관에는
보여드렸듯이 성덕대왕신종 고산서터 삼층석탑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자 저와함께 신라 천년의 역사 문화와
과거로 만나는 여행을 해보실래요
현대와 과거가 공존한다고하는데 산자와

죽은자의 만남 신라 천년역사와 문화
사진보고컴퓨터로 설명할께요(사진촬영 가능)


2018년 4.8.일요일(본인의  카스에  등록한글 )


 신라   역사관에서는   제1실   제2실  제3실 제4실로 나누어져있습니다  

사진이  다소  뒤죽박죽 이해하기힘들지만    ~~



제1실은 아득히 오래된 구석기시대부터 5세기 말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사시대 돌도끼를 쓰던 경주 일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을 이루고 사회ㆍ정치적으로 점차 성장해 국가를 세웠는지 볼 수 있습니다.또한 건국 이후 천년왕국의 기틀을 다져간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실   책자에도  아랫글처럼   그데로적혀있어요  글스기 귀찮아서요  모셔왔어요 



신라는 4세기 중반에 마립간이라는 지배자를 중심으로 고대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마립간과 그 일족은 금·은·금동으로 화려하게 세공을 한 각종 장신구를 걸쳤고, 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도 썼습니다. 제2실에서는 신라가 황금의 나라였으며, 지배자들에게 황금은 곧 권력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주요 전시품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국보)과 금제허리띠(국보)·조익형관식(국보)·흉식(보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고배(보물)와 금제허리띠(보물) 등입니다.(국립경주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발췌 )
 

신라의   황금문화 






황남대총을  만드는 과정 




신라사람들 부자였나봅니다    금귀걸이가   나오느널보면은요  ㅋㅋㅋㅋ




금관  금허리띠   

경주천마총    ~무거워서  어찌하고다녔을까요    ?




금관

  • 유물번호국보 제188호
  • 크기높이 32.5cm
  • 시대한국/신라
  • 상세정보 신라 금관(金冠)의 화려함을 잘 표현한 걸작 중의 하나이다. 신라 금관은 보통 둥근 테[臺輪]에 3개의 나뭇가지모양 장식[出字形立飾]과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鹿角形立飾]을 세운 뒤, 곱은옥[曲玉]과 달개[瓔珞]로 가득 장식한다.

    둥근 테와 세움 장식판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점열무늬[點列文]와 파상무늬[波狀文]를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한다.

    관을 착용했을 때 양쪽 볼에 해당하는 부위의 둥근 테 지점에는 가는고리[細環]로 코일처럼 길게 꼰 사슬로 만든 드리개[垂下飾]를 매단다. 신라는 지배자의 상징으로 금(동)관을 활용한 결과, 경주의 왕족이 착용한 것은 물론이고 재질과 모양은 달랐지만 지방의 수장도 소유할 수 있었다.

    이는 금동관의 하사를 통해 지방의 수장을 회유하고 견제하려는 중앙정부의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그래서 고총과 화려한 위세품으로 통치기반을 확립해나가던 "마립간" 시기 즉 5세기대에 가장 화려하고, 불교가 국가의 이념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는 6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퇴화한다. 천마총 금관의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이전의 3단에서 4단으로 변한 점이 참조가 된다. (출처   경주국립박물관 )






목걸이 

  

목걸이

  • 유물번호보물 제634호
  • 크기길이 41.6㎝
  • 시대한국/신라
  • 상세정보 무덤 주인의 가슴 부위에서 출토되었다. 비록 하나의 줄에 묶여 있지만 재질, 형태, 크기, 색상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마노제의 곱은옥, 다면옥, 둥근옥, 벽옥제의 대롱옥, 수정제의 대추옥, 유리제의 둥근옥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색상도 붉은빛과 푸른빛, 초록빛 등으로 다양하다. 특히 유리제 둥근옥 중에는 지름이 1.8㎝에 이르는 대형구슬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표면에 파랑·노랑·빨강·흰색의 색유리로 사람얼굴과 오리, 꽃나무 무늬 등을 정교하게 만들어 붙였다.

 

유리제 잔
  • 유물번호보물 제620호
  • 시대한국/신라
  • 재질 높이 7.4cm, 폭 7.3cm
  • 상세정보 우리나라에서 유리 제작 기술은 대략 기원 전후한 시점에 도입되어 천하석제 옥과 함게 장신구에 많이 활용되었다. 유리로 만든 그릇은 삼국 중 신라의 왕족 무덤에서만 출토되는 경향이며, 이 또한 신라 지배층의 독특한 장례문화와 연관된다. 유리 제품은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봉수병과 유리잔의 사례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과 중국 등을 거쳐 수입된 것도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입 제품은 봉수병에서 부러진 손잡이를 금실로 감아 보수한 흔적이 있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귀중하게 다루었을 가능성이 있다.     
  • (출처   국립경주  박물관   )



장식보검

  • 유물번호보물 제635호
  • 크기길이 36cm
  • 시대한국/신라
  • 상세정보 경주 계림로 14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원래는 꼭지가 달린 자루나 칼집에 나무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썩어서 없어졌다. 칼집과 자루에는 얇은 금판을 전면에 입히고, 다시 작은 금판을 세워 붙여 물결·나뭇잎·원·타원·태극무늬 등을 만들어 조합시켰다. 이러한 무늬에는 붉은 마노와 재질을 알 수 없는 보석이 박혀있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의 아름다움과 함께 보석의 붉은빛과 잿빛 및 금판의 금빛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출처    (국립경주  박물관 홈페이지서  발췌






가슴걸이
  • 유물번호보물 제619호
  • 크기전체길이 64.0㎝
  • 시대한국/신라
  • 상세정보 무덤 주인의 가슴 부위에서 출토되었다. 가슴 쪽은 U자형으로 늘어뜨리고, 양끝의 일부는 등 뒤로 넘겼다. 푸른빛의 둥근옥과 속이 빈 금제 구슬을 이어서 여섯 줄로 엮고, 네모기둥 모양의 금장식을 중간에 넣어서 가슴 쪽은 다섯 줄, 등 쪽은 세 줄이 되도록 고정하였다. 가슴 쪽과 등 쪽 끝에는 벽옥제 곱은옥을 각각 한 점씩 매달아 장식성을 높였다. 이와 같은 가슴걸이는 신라 지배계층의 상징적인 껴묻거리[副葬品]로 많이 애용되었다
  • 출처    (국립경주 박물관홈페이지서  발췌 )


천마총  발 굴 


울진   봉평리 신라비   





포항   중성리신라비  








신라불교를  받아들이다   신라최초의   사찰 흥륜사 





이차돈순교비


이차돈순교비

  • 크기높이: 106
  • 시대한국/통일신라
  • 상세정보 불교를 제창하다 527년(法興王 14)에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그가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818년(憲德王 10년)에 세운 6면 비석이다. 비석의 5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씨를 새겼으나 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렵다. 나머지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순교장면은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 오르는 장면이 좁은 석면(石面)에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국립 경주박물관 홈페이지서발췌 )






























지금의  첨성대는 현대인에게  어떤의미를  부여할까요   

역사의    흐름속에현대인은  어지평가를  할까요   이동하면서  찍으서   활자가잘안보이네요  





추정하여  복원     ~~`


영상은  계속 방송되고있었으나  자리를 이동  하였습니다  


문무왕비

  • 크기최대높이 : 55 / 너비 : 94
  • 시대한국/통일신라(682년)
  • 상세정보 이 비석은 정조(正祖) 20년(1796년) 무렵,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어던 홍양호(洪良浩)가 발견한 2조각 중 하나다. 비석은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 있는 귀부(龜趺)에 서 있었던 것 같으며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681년 또는 이후로 보는 2가지 견해가 있다. 비문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마모(磨耗)가 되어 전문(全文)의 판독은 불가능하지만, 대체로 앞쪽은 신라에 대한 찬양, 신라 김씨의 내력, 무열왕(武烈王)의 치적, 문무왕(文武王)의 업적 및 백제 평정에 관한 것이다.   출처   (국립경주  박물관 홈페이지서  발췌 )



문무왕  전쟁믈 마무리하다  



※휴관일 1.1일
설날 추석
※관람시간 10:00~18:00
※일요일 공휴일 1시간연장
※야간연장 개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3~12월 토요일



※주소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전화 054ㅡ740ㅡ7501

찿아가시는방법

※철도 KTX신경주역 700번버스이용 동궁과 월지 (안압지)앞 하차 소요시간 25분 .도보3분

※KTX신경주역 50.51.60.61..70버스이용시 고속터미널 (시외)에서 하차후
아래번호로 차량으로 환승

※시외버스고속버스터미널또는 경주역 11.600.601.603.604.605.607.608.609
버스이용
※입정료 무료
하지만 무료 관람권을 받아야 입장할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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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8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