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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아트 뮤지엄 - 6. 돈도 명성도 싫어 / 밀레

doggya 2006. 7. 16. 10:15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처음 보시는 분들께서는 1편에 간단한 뮤지엄의 소개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오늘은 미로와 몬드리안, 그리고 밀레의 작품들을 보여드릴께요.

 

호안 또는 쟌(존) 미로 (Joan Miro 1893~1983)

 

꿈의 세계를 보인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화가

 

피카소, 달리와 더불어 스페인이 낳은 세기의 화가중의 하나인 미로는 바르셀로나에서 가까운 몬트로이그(Montroig에서 태어나 1912년경에 그림을 시작했다고 해요.
초등학교를 그곳에서 마치고 14세 때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들어갔는데, 몇 년을 다니지도 못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미술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지 뭐예요.
그러다가 19살에 그는 다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아카데미 가리’에 들어 가 고전적인 화법을 익히다가. 1919년 파리로 와서 1924년 경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알게 되면서 그의 그림에 환상적인 요소가 등장하게 됩니다.

 

 

                                             1925년의 경찰


또한 피카소와 어울려 큐비즘 운동에 도 가담하게 되지요

그가 25살에 처음으로 개인 전시회를 바르셀로나에서 가졌는데 당시의 작품 경향은 미로가 평소 좋아했던 고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당시 유럽의 화단에 영향을 끼치고 있던 포비즘의 경향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고 해요. 

 

 

                                         1918년의 초상화

 

한마디로 그의 작품세계는 클레(Klee)와 칸딘스키(Kandinsky)의 영향을 받아 구상의 수법에서 떨어져 나와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전개되게 되는데, 그러한 기호들에서 선이나 색채는 어린시절의 상징들과 직접적인 서정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어요.

 

 

                                          1906년의 작품
.
미로는 한참을 작업에 몰두하다가도 때때로 한달 동안 그 캔버스에 손도 안대고 내버려 두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시 캔버스를 꺼내 작업을 계속하곤 했다고 해요..

 

 

                              1935년 여자와 사랑에 빠진 유명인사

 

그의 그림을 보면 초현실주의자라고 하지만, 그가 초현실회화의 중요한 기법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은 무의식이나 꿈의 내용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재현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에 막연히 그냥 초현실주의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다고 볼 수가 있지요.
1925년에 완성한 [어릿광대의 사육제]는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에 출품한 작품인데, 그 후 초현실주의가 막을 내린 1940년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기법을 고수해 나가게 됩니다. 

 

 

                                      1956년의 무제

 

많은 작가, 비평가, 시인들이 미로에 대해 때로는 감정적으로, 또는  날카롭게 비평을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미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하네요.

 

"내 성격은 비극적이고 과묵하다. 어릴 때 나는 심오한 슬품의 시기를 겪었다. 모 든 것이 나를 구역질나게 만들고, 인생은 부조리한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비관론자이며,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내 그림에 유머러스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니다. 아마 그 유머는 내 기질의 비극적인 면을 벗어나려는 욕구에서 나온 것 일지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반응 이지만 의식적인 반응은 아니다.

 

반면에 내 작품의 의도적인 면은 정신적 긴장의 상태이며, 나는 이러한 긴장을 위해 가장 좋은 분위기를 내 산책길에서 찾는다.

시골길에서의 말의 소음.. 마차바퀴의 삐걱거리는 소리.. 발자국소리..귀뚜라미소리..등이 나를 자극하고, 하늘의 모습은 나를 멍하게 만든다.

나는 가장 간단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부자들이 사용하는 우수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접시보다 농부들의 수프접시를 더 좋아한다. 내게 있어서 대상이란 무언가 살아있는 것.. 담배나 성냥갑은 어떤 인간의 삶보다 훨씬 긴장된 삶을 가지고 있다. 나무를 볼 때 나는 나무가 마치 숨쉬고 말하는 물체인냥 충격을 받는다...."

 

 

                            1933년의 유명인사와 배우들

 

그래서 그의 작품속에는 정열과 새로움을 분출되며, 동시에 표면적으로 평화로우면서도 깊은 고독 속에서, 엄격함을 지키려는 내적인 갈등등, 미로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어요.

미로는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전에서 판화 국제상도 받기도 했는데,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생물, 불가사리, 초승달, 별, 뱀 등이 기호로 된 모습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독자적인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지요.

 

 

                                      1955년의 바위

 

 

                                           1927년 곡마단의 말

 

 

미로의 그림중 제가 좋아하는 것을 그려봤어요. 그리고 친구가 달라고 해서 주었죠. 그냥 재미로 구경.....


몬드리안  (Mondrian,Piet 1872-1944)

 

신조형주의 주창자인 몬드리안

 

 

                                   1935년의 구성 

 

몬드리안의 작품은 많은 디자이너들이 사용하여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하지요.
사실 몬드리안도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한때 "데 슈틸(De Stijl)"이라는 디자인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을 정도 였어요.

 

많은 화가들이 초창기에 그러했듯이 몬드리안도 네덜란드의 농가의 풍경이나 나무를 즐겨 그리던 자연주의 화가였어요.
그러나 큐비즘을 접한 이후 몬드리안의 그림은 점점 추상적이 되는데, 그가 애용하는 수평선과 수직선의 구도는 네덜란드 풍경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네요.

 

 

                                         1916년의 농장


몬드리안은 당시 지식층에서 유행하던 신지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 신지학이란 거의 종교에 가까운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으며, 일종의 철학 체계로 눈에 보이는 현상들 뒤에 숨어 있는 변하지 않는 보편적 실재를 탐구하는 학문이었다고 해요.
물질주의를 지향하는 서구문명에 식상해 있던 많은 지식인들이 이 동양적인 신비성을 띤 학문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칸딘스키와 클레같은 미술가들도 있었고 하는군요.

 

 

"회화에 있어서 위치와 직선의 2원성에 의한 조형표현이 가장 순수한 것으로서도 새로운 조형은 현재화된 색채를 채용한다."

 

라고 말한 몬드리안 자신은 신조형주의에 대해서 신조형주의는 단지 회화에의 실현에 있는 것만은 아니며, 신조형주의의 조형 원리는 가장 보편적인 것을, 현상의 가장 본질적인 면을 현실적으로 조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1921년의 빨강, 검정, 파랑, 노랑의 마름모꼴 구성

 

몬드리안의 대표적 작품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여러 개 한꺼번에 본다면, 맨 처음 느껴지는 것은 '다 똑같다' 라는 느낌을 가지게 돼요.
백지 위에 검은 선 몇 개 그리고, 몇 개의 칸에 빨강, 노랑, 파랑 색을 칠해놓고 그 것의 변화만 조금씩 주어진 것이 각각의 작품이니까요.
그러나 그 각각의 흰색 면조차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칠해져 있으며 검은 선의 굵기가 서로 다 다른 작가의 세심한 계획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또한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직선들과 색들은, 실제로는 어떤 형태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까지 추상화된 것들로 이러한 추상화의 단계는 그가 나무를 그린 그림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나무의 형상이 서서히 추상화되어 수직, 수평선으로만 표현되는 단계, 그것이 몬드리안이 추구하는 실재에 가까운 것이라고 평가들을 하지요.

 

몬드리안의 화풍, 조형원리는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의 화실은 가구는 수수하고 별로 놓여있는 것이 없이 너무도 단정했다고 해요.
몬드리안은 벽과 가구들을 「슈틸」의 원리에 따라 칠을 하였으며, 벽은 수직과 수평으로 장식하고,바탕은 순수한 빨강, 노랑, 까만 색으로 둘러싸고, 마루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으며, 부엌의 식탁은 흰색으로 칠하여져 있고, 빨강 서랍이 달려위있었으며, 이젤위에 놓여있는 그림과 다른 캔버스들은 벽의 패턴과 어울리게 조심스럽게 놓여 있었다고 하는군요.

 

밀레 (Jean F. Millet 1814~1875)

 

자연주의- 자연을 주제로 숭고함과 웅대함으로 승화

마네와 달리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사실주의 작가로 활동한 밀레는 다른 주제의식을 소유한 작가였어요.


밀레의 주제는 자신의 '노동'으로 주어진 형태에다 의식으로서의 무게가 매일의 일상을 보편적인 숭고함과 웅대함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되지요.


그의 작품에는 주제와 당시 계층의 문제를 연결하려는 의도가 돋보이는데, 밀레는 당시에 유행하는 양식을 따라 팔릴 그림을 제작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피하고 굳이 이러한 주제를 계속 추구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계몽주의적, 금욕주의적 작가라고 볼 수가 있어요.

 

 

                                1866-69 년의 Auvergne 에서


밀레와 바르비종(Barbizon) 파는 사실주의 작가들이면서도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했기에, 농촌 생활의 구체적 노동과 환경을 다루지만, 날카로운 비판의식보다는 미화된 고요함이 있다고 볼 수가 있어요.
작품 '만종'에 대해서 밀레 자신은 문학적인 감정보다는 음악적인 감정을 더 강조했다고 하는데, 밀레의 정신은 훗날 쿠르베의 사실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밀레가 그린 농민들은 바르비종에서 땅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농민화가였으며, 그의 그림은 한 시대의 풍속화가라고 일컬어 지기도 하지요.
밀레의 그림은 고요하고 경건하다고 평가받는데, 초기에는 유화를 많이 그렸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스케치나 파스텔화를 주로 그렸어요.

밀레는 평생 가난과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말았어요.

 

좋은 구경 되셨나요?

다음에는 근대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드리기 전에 아프리카로 가서 토속 미술품들을 구경시켜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