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지구여행과 체험/시카고

시카고 아트 뮤지엄 - 8. 인상파의 전과 후

doggya 2006. 7. 20. 06:42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처음 보시는 분들께서는 1편에 간단한 뮤지엄의 소개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그럼 오늘은 우선 유럽을 휩쓸었넌 인상주의 개척자인 마네를 만나 보시겠어요.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전통과 혁신의 중개역활을 한 인상주의의 개척자"

마네는 프랑스 파리 출생의 화가로 인상주의의 개척자로 불린답니다.

 

유복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엔 아버지의 반대로 견습선원으로 있다가 1850년 겨우 퀴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는데, 아카데믹한 교습에 반발하고 루브르 박물관의 고전회화를 모사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네덜란드의 화가들로 부터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1864년의 생선

 

그후 살롱에 여러번 출품했으나 번번이 낙선을 거듭했다고 해요.
그 이유는 그의 작품은 이미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한 후여서 그 시대사조에  대단히 이색적이며 혁신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오히려 그런 요소가 세간의 주목을 끌어 그의 표현기법이 오히려 신선하고, 참신한 이미지로 나타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답니다. .

 

 

                                      1864년의 스팀보트


마네는  피사로, 모네 , 시슬레 등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후에 인상주의의 길을 여는데 기둥역할을 하게 됩니다.

 

 

                               1866년의 Longchamp 의 경마


쇠라(George Seurat, 1859∼1891)

 

신인상파의 진로와 완성의 대변자라고 불리우지요.

쇠라는 32살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신인상주의의 선구자이며, 인상주의를 다시 프랑스의 뿌리 깊은 고전주의로 회귀시킨 화가이기도 하답니다. 


쇠라의 주제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을 즐겨 다뤘지만, 한편으로 상징주의자들이 애호하던 신비감과 분위기를 그 안에 부여했는데, 여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수학자 샤를 앙라예요.
그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에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음악에 관철되는 성격을 색과 선에 접목시켜 동일한 법칙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쇠라의 그림들은 놀라울 정도로 조그마한 색점들이 전체를 구성하면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복사본으로는 원화의 감동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은 그랑드 쟈뜨 섬의 일요일 오후, 조르주 쇠라, 1884∼86년,

 

이 작품이 제작될 동안 쇠라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그랑자트 섬에 나가 여러 포즈를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오후에는 그 모습들을 새롭게 조형적으로 만들어 화면에 배치하곤 했다고 해요.


1884년 5월부터 작업에 착수해서 1985년 3월까지 대강의 윤곽을 잡은 뒤, 1985년 10월에 다시 작업에 들어가 1986년 5월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되는데, 순색의 작은 반점의 병치로 더욱 완벽한 분할 묘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정감적인 인상파를 극복하고, 그 고유의 과학적 인상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1886년 제 8회 인상파전에 큰 반항을 일으킨 작품으로 보고 있답니다.


또한 그는 가장 이상적인 구도를 만들기 위해 고전주의적 황금분할 비례체계를 연구습하고 그 연구 결과를 이 작품에 적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볼 때, 쇠라는 인상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전주의적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체계적인 이론과 규칙에 따르고, 오랜 습작 기간을 거쳐 신중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것 이 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작품을 통하여 인생(人生)의 이야기를 한 화가.


말(馬)과 물랭 루즈, 무희(舞姬) 그리고 창부(娼婦)들의 화가이며, 명문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사고로 불구가 되고, 서른일곱 살에 알콜 중독으로 죽은 난쟁이 화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을 거예요.


난쟁이라는 신체적 불구가 귀족 로트렉에게 비극적인 운명을 안겨 주었다면, 화가 로트렉에게는 위대한 예술을 안겨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신체적인 불구를 극복하고 정신적으로 완벽한 자유를 누렸던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독특했다고 볼 수가 있어요.

 

신체불구자인 그는 무척 고독하고 비극적인 인간이었음에도 우스꽝스러운 그의 용모가 보여주듯이 표면적으로는 명랑하고 사교적이었다고 해요.


그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광대나 창부 같은 사회의 하층민들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많이 남겼고, 그 대상의 비극적인 면을 조금이라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냉혹할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희극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1895년의 물랑루즈에서

 

물랑루즈의 한구석에서 대화하는 몇 사람을 그려 놓은 그림인데,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왼쪽 끝에 있는 붉은 수염을 기른 노인은 비평가 에두아르 뒤자르댕이며, 그 오른쪽은 스페인의 댄서 라마카로나, 그리고 사진 작가인 세스코, 실업가이며 로트렉의 친구였던 모리스 기베르 등이 그림속에 들어 있어요.


또 그 뒤쪽에서 붉은 머리를 손질하면서 돌아서 있는 여인은 라 굴뤼, 그 왼쪽에 둘이서 나란히 걷는 사람이 로트렉과 그의 사촌 동생 타비에드 셀레이랑인데, 사촌이 키가 크기 때문에 키가 작은 로트렉과의 배치가 아주 유머러스하게 보이지요.
오른쪽 끝의 '녹색과 황색의 칸델라'라는 평을 받는 네리 양의 얼굴은 특수한 조명 효과 때문에 가면을 보는 것 같은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요. 

 

로트렉의 관심거리는 생활 속에서 움직이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의 개성이었는데, 이런 점은 동시대를 살았던 드가와 로트렉을 구별되는 결정적인 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두 사람은 냉철한 관찰자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드가가 일반적인 인간을 차갑게 비개성적으로 표현을 한 반면, 로트렉은 인간의 개성을 관찰하고 개성을 창조해냈다는 것이 차이점이며, 드가의 그림은 일반적인 '무희'이지만, 로트렉의 그림은 뚜렷한 개성을 지닌 구체적인 사람이라는 점이 차이지지요.

 

Gustave Caillebotte  (1848-1894)  

 

 

                        1877년도의 비오는 날의 파리의 거리 

 

이 그림을 그린  Gustave Caillebott 는 파리 북부에 살면서 초기부터 상당히 큰 대작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지요.
그의 작품의 특성은  상당히 수학적인 구성을 통해서 아주 치밀하게 계산한 원근법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어요.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i(1866~1944)

 

추상(抽象)창조의 선구자.

모스크바 출생으로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여 현대 추상미술을 창시한 한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있지요.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1895년 인상파전에서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이듬해인 1896년 뮌헨으로 옮겨 아즈베와 F.슈투크에게 사사하여 화가로 전향하고 1905년부터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지요.

 

 

                                1909년의 Mumtau의 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모스크바로 돌아가, 1918년 미술학교 교수가 그리고, 19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로서 후진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으며, 만년에는 프랑스에 정주하였는데, 한때는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P.C.몬드리안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지요.

 

 

                   1913년의 작품인 Painting with Cross Center

 

칸딘스키는 일찌기 자신이 공감각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고 얘기를 했는데, 예를 들면 어떤 장면이나 색채를 보고 있을 때 어떤 소리를 들었고, 음악을 들으면서 하나의 색채나 장면을 볼 수 있었다고 하며 그가 보거나 들은 것은 어떤 특수한 악기의 특별한 음조와 같이 꽤 구체적이었다고 하니 놀랍지요?

 

아마데오 카도소 (Amadeo de Souza Cardoso 1887-1019) 

 

폴투갈 출신의 화가로써, 폴투갈 밖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지만, 한때 파리에서 결성된 국제 미술가 협회에서 많은 활동을 한 화가입니다.

 

 

                               1911년의 작품인 토끼의 도약

 

Ferdinand Hodler 91853-1918)

 

이 화가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자기 나라인 스위스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같은 시대를 살다 간 화가랍니다.

 

 

                           1896-98 년의 어떤 날

 

Maurice de Vlaminck (1876-1958)

 

역시 널리 알료지지 않은 프랑스의 화가

 

 

                              1905년 작퓸인 Cautou의 집

 

 

클레 (Paul Klee 1879~1940)

 

태초(太初)의 형(型)을 찾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술의 본질을 추구.

 

파울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에서 성악가인 아버지 한스 클레와 역시 음악을 공부한  어머니 마리아 프리크사이에서 태어납니다.

 

클레 역시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후에 결혼한 릴리 슈툼프도 피아노 교수였는데, 프랑스에서는 그를 '그림의 시인'이라고 말을 하지요.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지적인 요소와 함께 시적 상징성과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이 그림 속에서 잘 구현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보고들 있답니다. 

 

 

                           1934년의 작품인 요술거울안에서

 

그는 음악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과 경험을 미술 안에서 통합시켰다고 볼 수 가 잇어요.

그의 작품이 조금 괴기하고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선묘와 추상적 기법을 쓰고 있지만도 피카소의 기괴한 분위기와는 달리 서정적 분위기 연출하는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데다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적 요소가 공상적이고 우화적인 요소로 승화되어 그림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좋은 구경되셨나요?

다음에는 현대미술과 이해하기 힘든 추상파를 보여드리기 전에 남미쪽으로 여러분을 모시겠어요.

기대해 주세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