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지구여행과 체험/시카고

시카고 아트 뮤지엄 - 10. 추상파는 왜 이해가 안 될까?

doggya 2006. 7. 24. 04:36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처음 보시는 분들께서는 1편에 간단한 뮤지엄의 소개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그럼 오늘은 가까운 현대쪽으로 옮겨 가도록 햘께요.

 

 

 

잭슨 몰락(Jackson Pollock 1912 - 1956 )

 

"액?페인팅(action painting)" 로 20세기 추상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세계적인 추상화가지요.

 

 

                                    작업중인 잭슨 폴락
 
2차대전 이후 현대미술은 그 중심지를 유럽에서 신대륙, 즉 미국으로 옮기게 됩니다.
파리에서 뉴욕으로의 이동이 시작된거지요.


2차대전은 유럽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수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피폐하게 되어 전쟁을 피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인구가 많아지게 되면서 예술계의 판도가 바뀌게 됩니다.

 

미국태생인 잭슨 폴락은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처음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열등생 취급 받는 미술학도에 불과했다고 해요.
그는 데생 실력이 다른 사람들에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으며, 정신적으로도 미숙한 데가 있어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러한 잭슨 폴락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같은 작가 지망생 리 크레이스너(Lee Krasner로써  둘은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갔고, 크레이스너는 폴락이 미술계를 뒤흔들 엄청난 천재성을 갖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으니, 여자의 직감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하여간 그건 무서운 건가 봅니다.

 

 

                               1938 - 41년에 제작된 무제

 

곧 그녀는 폴락을 성공시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가는데, 우선 폴락이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고 해요.

 

그리고 폴락의 그림을 미술계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소개하고 다녔는데, 그 중 한명이 미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 뉴욕에 이 이름을 딴 구겐하임 뮤지엄이 있어요) 이 있었지요.


당시 페기 구겐하임은 젊고 유능한 신인 작가들을 엄선해 미술계의 "큰 손"들에게 소개해주는 후원자를 자처하고 있었는데, 주로 남성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자주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크레이스너는 개의치 않았다고 해요.


폴락을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선 페기 구겐하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고, 크레이스너는 이후 폴락이 구겐하임과 통정을 하는 것마저 눈감아 주었다고 하니,......
맘이 넓은건지, 아니면 야망이 큰거지......

 

 

                                           1946년의 열쇠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주선으로 폴락은 생애 첫 개인전을 가졌고, 일약 뉴욕 미술시장의 스타로 떠오르게 됨과 동시에 그의 그림은 상당한 가격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하지요. 

 

폴락이 그린(?) 그림은 어떤 사물을 재현하고 있지 않아요.
그림이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화면에 물감을 뿌리고, 던지고 튕기는 폴락의 행위일 겁니다.


다시말해 폴락의 그림은 그의 움직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체와 아주 밀접한 그림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폴락은 어떠한 계획도 의도도 없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밑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화가들이 사용하는 물감이 아니고, 상업용 에나멜 페인트였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그 많은 양의 페인트를 당해 내지 못했을거예요.

 

 

                       1953년에 완성된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폴락의 행위는 아주 즉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그의 그림에서 어떤 이미지나 느낌을 발견하게 되 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종종 아주 시적인 제목이 붙여지기도 했어요.
<가을리듬>(1950)이라든지, (1949, 또는 <연보랏빛 안개(Lavender Mist)>라는 서정성 짙은 제목들이 붙여졌지요.

 

폴락이후 많은 미술가들은 폴락과 같은 거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물감을 분무기같은 데에 넣고 뿜어 댄다든지, 아니면, 캔버스위를 자전거를 타고 통과한다든지, 물감주머니에 총을 쏘아 터뜨린다든지... 이들 모두는 그들의 행위와 매우 밀접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경우라 할 수 있지요.

 

 

골키 (Arshile Gorky, 1904-1948)

 

골키는 유럽과 미국의 예술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원래 출생지는 아르메니아인데, 192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해서 미국에서 활동한 추상 표현주의 화가예요.
그는 조금 늦은 1926년 유럽으로 부터 미국으로 이민한 de Kooning 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1940년의 대공황중 무명시절을 보내면서 서로 격려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해요.

 

 

                                    1927-28년의 자화상

 

 

장 드뷔페(Jean Dubuffet, 1901-1985)

 

앵포르멜회화의 선구자이자 Art brut 개념의 창시자

 

스위스의 로잔이라는 곳에 가면 Art Brut라는 미술관이 있는데,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직업적인 화가가 아닌, 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병력을 지닌 사람, 감옥을 들락거린 사람, ‘영혼’에 빠진 사람, 노년에 홀로 그림을 시작한 사람들, 즉, 예술과 관계 없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만든  작품들, 즉 인간 삶의 기반이 표현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그럼 ‘Art brut' 이란 무슨 뜻일까요? - '가공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예술' 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랍니다.

1945년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창작 작품을 지칭한 말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이은 이들이 미술 제도 바깥에서 창작을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1972년 로저 카디널이 영어로 번역한 것이 ‘Outsider Art’ 라는 단어예요.

 

 

                                        1939년의 나는 새

 

드뷔페는 1945년 처음 베른과 로잔에서 기존 화풍이나 예술과는 전혀 다른 생생함을 담고 있는 정신질환자들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그 후 그는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데 매달리게 되고 그 결과 ‘Art brut’ 미술관이 탄생하게 된 거지요. 

드뷔페는 Art brut를

 

 "즉흥적이고 지극히 창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작품 활동으로, 흔히 얘기하는 예술이나 상투적인 문화와는 거의 연루된 바가 없는 예술을 말한다. 그 작가들은 직업적인 미술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

 

라고 정의했어요. 

 

 

1958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커다란 흰색 캔버스에 못을 잔뜩 박아서 불빛에 그 못이 만드는 그림자의 음영과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작품이지요. 제목은 태양아래서의 휴가

아마도 못을 박은 이유는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더 표현하고 싶었는지...... 

 

자신까지 잊을 정도로 열광하며, 칭찬이나 이익에 관계 않고 절대 고독 속에서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예술장르가 바로 Art brut 인데,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미술치료가 성행하기 시작한 1950년대에 이르면서  신경안정제의 발전으로 망상과 환각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창조적광기는 약물에 의해서 거세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지요.

 

 

 

쟈코메티 (Alberto Giacometti. 1901-1966)

 

조각은 사람을 담고, 사람은 영혼을 담는다

뭉크가 사람들에게서 시체의 얼굴을 보았다면 쟈코메티는 그들 영혼의 가벼움을 보았고 인간을 그 영혼을 담고 있는 형체가 아닌 영혼의 기본적 실체에 포커스를 맞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가 남긴 조각 작품을 보면 점점 가늘어져만 가는 모습에서 위태로운 현실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가 있지요.


한 때 그의 작품은 성냥갑 속에 들어 갈 만 큼 작았고, 깍아내다 못해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고 할만큼 형태의 무게감을 덜어내고자 열중했는데, 쟈코메티는 겉치레가 없어질 때 인간에게 남아 있게 될 것을 발견하기 위해 시선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해 버릴 줄 아는 작가였다고 말해지고 있지요.

 

스위스의 보로고노브에서 태어난 조각가이자 화가인 쟈코메티는  처음에는 피카소와 같은 큐비즘에도 참여를 했지만, 나중에는 인간의 고독을 강렬하게 드러냄으로써 문학의 실존주의와 비견되기도 하는 작품들을 남겼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화가나 조각가 뿐이 아니고, 많은 작가나 시인들이 그의 적품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답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아버지 조반니와 야수파 화가이자 그의 대부인 퀴노 아미에트에게 많은 격려를 받으면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요.

 

다른 전위파 예술가들이 실재와 유사한 표현을 추구하기 보다는 비구상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내용을 묘사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이 모델로 한 인물이 드로잉이나 회화나 조각에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은 충격을 겪을 만큼 실제 세계에 필적하고자 하는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어요.

 

 

                               1962년의 캐롤라인


그의 인물상들을 정면에서 보면, 처음에는 부피도 무게도 없는 듯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 멀리 어느 공간엔가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그의 조각들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답니다.

 

자코메티가 그의 가늘고 길다란 위태로운 모습의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가지게 된 것은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의 미술 수업과 함께 피렌체와 로마, 파리에서 많은 이집트 미술품들을 감상하면서 정형화된 형태와 경직된 정면상을 보이는 고대 원시종교미술 형식이 실체와 같은 묘한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 그때부터 그 기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군요.

 

쟈코메티는 살아 생전에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몽파르나스의 초라한 작업실에서 살기를 고집할 정도로 소박한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1960년의 걸어가는 사람 

 

쟈코메티는“나는 생명체, 그 중 무엇보다도 사람의 머리 앞에 서면 그 생명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 기(氣)가 그것을 순간적으로 파고들어서 이 양자가 이미 하나가 되어 버린 듯함을 때때로 느낀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1963년의 Figure


그의 작품은 그 형상이 지니고 있는 비현실성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형상과 그 형상들 사이의 비워진 부분을 모두 포함한 그 전체로 보아야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가 있답니다.

 쟈코메티의 조각 작품들 속에 정신의 깊이가 느껴진다거나 인간의 고독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무엇보다 쟈코메티 자신이 피그말리온처럼 조각 안에 사람의 영혼을 담으려고 했던 조각가이자 화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각은 사람을 담고, 사람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일지도........

 

 


막스 에른스트 ( Max Enrst, 1891-1976) 

 

독일에서 태어난 프랑스 화가인 에른스트는  1924년에 시작된 초현실주의 화가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지요.


시인 앙드레 브레통은


"초현실주의란 말, 글, 혹은 그밖의 다른 방법으로 마음의 진실한 기능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된 순수한 정신의 자동주의(Automatism)이다. 다시말해 이성에 의해 훈련된 어떤 제약도 없이, 또한 어떠한 도덕적 미학적 선입견도 초월한 사고의 진술이다"
라고 초현실주의를 말했어요.

 

작품을 만들때 캔버스에 실제 사물을 부착하는 방법을 아쌍블라쥬(assemblage)라고 하고, 물건을 밑에 대고 문질러서 무늬를 나타내는 프로타쥬(frottage)  기법이 있는데, 에른스트는 이런 기법들을 써서 환상적인 이미지를 많이 만들어 냈지요.

 

 

1925년의 푸른 숲, 나무판자와 닭장철사를 밑에 놓고 문지른 것 처럼 보이는 무늬를 낸거랍니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목표는 인간성의 진정한 근원인 환상, 꿈, 상상 등을 열어보이는 것으로써, 외견상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꿈과 현실의 상태들을 일종의 절대적 현실로 용해시킨 것이 극대화된 현실세계요, 초현실(super-reality)이라는 것입니다.

 

 

1920년의 작품인데, 이 작품은 폴 고갱을 다다이즘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요.

다다이즘은 밑에서 설명을 다시 할께요.


그래서 초현실주의자들은 미술이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인 문화양식에 대항하도록 하였으며,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광기, 꿈, 환상, 욕정, 컴플렉스들을 해방함으로써 정신의 완전한 자유를 얻고자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러한 실천에 있어서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입문>이었어요.

 

 

                              1944년의 작품, 아리조나의 여름밤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 (Giorgio de Chirico,1888-1978)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이자 조각가로서  당시의 큐비즘이나 미래파와는 전혀 색다른 그림을 그려 초현실주의의 또 다른 기원을 제공해 형이상학파라는 화파를 만든 예술가 입니다.

 

 

        1914년의 철학자의 정복, 앞에 커다랗게 보이는 것이 아티촉이예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우리가 완벽하게 알아볼 수 있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이라서 언뜻보기에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들로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게되면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럽고, 한편으론 불길한 느낌마저 든답니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크기는 사물 자체의 친숙성을 오히려 낯설게 느끼게도 하지요.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주의, 큐비즘, 미래주의, 초현실 주의등 19세기말과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유럽의 미술계에는 빠르게 여러가지 화풍이 생겨나고 없어지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1916년 취리히에서 탄생된다 다다Dada)운동이라고 있어요.

이것이 미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추상파보다도 더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의 시작이 된답니다.

 

 

                                   1928년의 작품인  풍경

 

다다이즘은  부르주아의 심각함에 대한 거부, 새로운 형태라면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여 어린이와 원시인, 혹은 미친 사람들의 편에 섰으며, 스펙타클이나 예술적인 제작물의 볼거리를 제공하기보다는 우연의 효과, 그리고 실수나 반항의 볼거리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한 사람으로 피카비아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후기 인상주의에서 시작을 했지만, 과감히 거기서 벗어나 기하학적인 회화에 이르게 되지요.
그는 . 각기 다른 시기들을 통하여 의식속에 굳어져 있는 소위, 예술이라고 하는 틀을 벗어나 예술 자체에 반기를 들었지만 허무를 맴도는 뛰어난 기교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이건 제가 다다이즘에 대해서 연구리포트를 쓸때에 만든 겉표지예요.

쓰고 남은 버스표, 극장표, 또는 비행기 표 아니면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 즉 어떻게 보면 쓰레기나 일샹에 쓰여지는 평범한 물건들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 다다이즘의 기본 개념이랍니다.

 

 

현대미술을 이해하는데 좀 도움이 되셨나요?

결국 이런 운동들은 에술이 반드시 눈을 즐겁게 주거나 사실을 묘사해서 보관해 두는 역활이외에 정신적인 면 또는 더 깊은 무언가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눈을 즐겁게 하고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예술이 죽은 건 아니니까, - 그건 불변이죠 -      염려는 마세요. ^_^

 

자, 그럼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