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달빛이 환하다
"언니, 우리 한 시간 되면 도착할 거예요. 그렇
게 알고 있어요."
시누는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먼저 끊었다. 뭘 새삼스럽게 자기
가 온다는 것을 전화로 알리고 야단이래? 하고 그녀는 속으로 중얼
거리며 남은 설거지를 했다. 밥솥을 열어보니 아침에 추석 차례상
을 차리고 남은 밥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다시 밥을 하자니 남
길 것 같고 그냥 이대로 저녁상을 차리면 될 것 같았다.
4년 전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시댁의 대소사는 그녀의
차지가 되었다. 차례 준비를 하는 일은 늘 힘에 부쳤다. 혼자서 시
장을 보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차례상을 차려야 했다. 시아
버지와 남편이 하는 일이라곤 차례상에 절을 하고 음복을 하고 음
식을 먹는 일이었다. 나머지 모든 뒷일은 그녀 혼자의 차지였다. 도
와줄 동서도 시어머니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과묵한 종갓집 며느리
처럼 아무런 불평 한마디 없이 일을 해내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바람을 쐬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시아버지는
안방에 누워 추석 특집프로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시골에 혼자 사는 시아버지는 걸핏하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반찬이 떨어졌다고, 용돈이 떨어졌다고, 몸이 아프다고 했다.
입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그녀는 집안 살림하랴, 두 아이
를 키우랴 늘 피곤했다. 박사 학위를 따고 이제 겨우 모교의 강사로
출강하게 된 남편 대신 그녀는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철
이 없던 시잘 남편이 배우처럼 잘생긴 것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간 시누이는 걸핏하면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돈을 꿔달라고 했다. 그녀는 서서히 시집 식
구들에게 지쳐가는 중이었다.
"언니, 우리 왔어요."
"어서 오세요, 아가씨. 시매부님도 안녕하셨어요. 소희야, 민희
야 어서와, 아이구, 우리 공주님들 이뻐졌네."
대문을 들어서는 시누이의 식구들에게 그녀는 반색을 했다. 그녀
도 친정에 가고 싶었지만 시어머니도 없는 집에 시아버지만 남겨두
고 가자니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친정 가는 것을 포
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냉장고에 보관해 둔 음식을 꺼내고, 전과 국을 데워 밥상을
얼른 차렸다. 그런데 그녀가 차린 밥상을 본 시누의 표정이 샐쭉해
졌다.
"언니, 이 밥 방금 한 거 아니죠?"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네, 밥이 하도 많이 남아서 그냥 차렸는데, 밥맛이 덜한가 보
죠?"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했는데, 우리 엄마가 살아계시면 안 이
럴 거야. 어떻게 아침에 한 식은 밥을 우리한테 줄 수가 있냐구. 내
가 한 시간 전에 왜 전화를 했겠냐구요. 언니, 정말 사소한 걸로 사
람 섭하게 하실래욧!"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점점 부아가 치밀어올랐으나 감정을 가
라앉히고 웃으며 대꾸했다.
"아가씨, 내가 잘못했어요. 담에는 꼭 따뜻한 밥 지어서 백년손님
대접해 드릴 테니 마음 푸세요."
치밀어오르는 화를 겨우 가라앉히고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시누이는 감독관처럼 팔짱을 끼고 부엌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입을 떼었다.
"언니, 그건 그렇고 장은 어디서 봤어요?"
"생선이나 고기를 할인 마트에서 사고 나물은 시장에서 샀는데
요."
"언니! 우리 엄마는 제삿장은 항상 읍내 시장에사 다 봤단 말이에
요. 그리고 아버지가 먹지도 않는 반찬은 왜 이렇게 많이 사와서 냉
장고에서 썩어나가게 하느냐 말이에요. 그때그때 해 드려야지. 사
람이 말이야, 귀찮으니까 뭐든지 대충대충이야. 그리고 저기 싱크
대 한번 봐요. 곰팡이 낀 거 안 보여요?"
"아가씨, 보자보자하니까 이거 너무 심하네. 그럼 아가씨가 다하
면 될 거 아니야.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그녀는 시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그녀의 반격을 받아
보지 않은 시누이는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시누는 눈을 커다랗
게 치켜뜨더니 소리를 지르고 야단법석을 피웠다. 신세 한탄에서부
터, 올케가 괄시하고 무시한다느니 하면서 온갖 케케묵은 이야기까
지 다 끌어내었다. 창고에 쌓인 먼지 묻은 물건들을 마구 끌어내듯
다 지난 이야기들을 들추어내는 바람에 그녀는 기가 막혔다.
시누이에게 대거리를 하면서 마주 소리를 질렀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시아버지까지 시누이 편을 들며 그녀를 심하게 나무랐다.
그녀는 하도 억장이 막혀서 집 밖으로 나와버렸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어두운 사당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좀처럼 힘든 일이 있어도 울지 않았는데 한 번 터진 눈물은
고장 난 수도처럼 쉴 새 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추석날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었다. 하늘에서는 한가위 대보름달이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몸을 움
찔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미안해, 내가 이렇게 용서를 빌게. 당신 맘 다 알아."
남편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달을 올려다보기엔 달빛은 너무나도 부드럽
고 환했다. 달빛이 감싸고 있는 지상의 풍경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
였다. 풀숲에선 귀뚜라미와 풀벌레들이 작고 여린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희생자 역할을 혼자서 다 떠맡는 것은 가족을 위하는 길이 아닐 거예요.
아내의 희생만으로, 남편의 고통으로 유지되는 가정의 행복은 거짓 행복
입니다. 추석날 달빛이 저리 환한데, 가족 중의 어느 누구도 힘들어하며
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희망라면 세 봉지(김옥숙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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