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아낄 건 없다
더 큰 사랑을 찾기 위하여
지금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어버릴 것
더 큰 땅을 찾기 위하여
지금 그대가 딛고 있는 땅을 잃어버릴 것.
-토마스 울프,「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중에서
무작정, 배낭 하나 메고 발길 닿는 대로 떠난 여행이었다. 예
나 지금이나 수업시절을 마치고 막 사회로 진출하는 20대 청
춘들은 취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가족들 앞에
서 처음 유럽에 가겠노라 선언했을 때 엄마는 긴 한숨을 쉬
며 걱정하셨다.
「그냥 얌전히 있다가 시집이나 가는 게···」
「엄맛!」
그렇게 그해 여름, 나는 가족들과 불편한(?)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랐다. 누군가 나를 가리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해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유럽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가는 열차 안에서 나
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서머타임 실시에 따른 휴가를 이
용해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는 서구 청년들을
만났을 땐 한없이 부러웠고, 넉넉한 자금과 넉넉한 일정으
로 자유롭게 여행하는 일본 청년들을 만났을 땐 몹시 질투
가 났다. 여전히 체제와 이념의 그늘 속에 근엄한 장막을 드
리우고 있는 동유럽에선 긴장과 초조함이 온몸을 감싸기도
했다. 새로운 세계와 정신 앞에 직립해 서 있다는 사실이 나
를 두려움과 설렘으로 몰아가는 날들이었다. 유럽은 내게
피신처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나는
유럽 대륙의 일정들을 마치고 이탈리아의 작은 항구에서 배
를 타고 꼬박 하루를 보낸 뒤 마지막 여정인 그리스 아테네
에 도착했다.
「수정? 웰컴 투 아테네! 나는 헬렌이라 불러줘요.」
여행 전 인터넷에서 미리 예약한 숙소의 여주인이 항구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녀는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인자
한 얼굴의 중년 여성이었다. 나는 와락 울음을 터뜨릴 뻔했
다. 내 손을 잡아준 그녀의 따뜻함이 오랫동안 잊고 지낸 엄
마의 감촉 같았기 때문이었다. 헬렌은 내 어깨를 다정하게
감쌌다.
「이런, 아리따운 나그네 아가씨, 울고 싶을 땐 울고 웃고
싶을 땐 웃어요. 인생에서 아낄 건 아무것도 없다오. 그 사실
을 깨닫는 데만도 인생은 늘 모자라게 마련이라우.」
아테네는 따뜻함과 뜨거움이 한데 섞여 있는 도시였다. 강
행군에 지친 나는 정든 고향을 다시 찾은 사람처럼 아테네
곳곳을 산보하듯 거닐었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로 바뀌었고,
지중해 푸른빛은 날로 그 깊이를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테네에서 뜨거운 열정을 만났다.
젊은 학생들이 아테네 도심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어깨를 겯고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뜨거웠지만 평화
로운 시위였다.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면 <전태일>쯤 되는 듯한 한 청년 노동자의 불꽃같은 삶을
추모하는 집회라는 게 헬렌의 설명이었다.
「떠나보지 않은 자는 결코 돌아올 수 없지. 그는 사람들을
위해 떠났기 때문에 영원히 사람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오.」
나는 헬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중해 푸른 물결처럼
거리를 넘실거리는 젊음의 빛들 한가운데서 나는 내 삶의 짚
어갈 이정표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아테네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나는 돌아갈 짐을 꾸
렸다. 숙소 앞 작은 골목길에서 나는 헬렌과 작별의 포옹을
나눴다.
「고마웠어요, 헬렌. 당신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자 행복이
었어요.」
「잘 가요, 수정.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삶이 당신의 가장
큰 위안이 되기를 빌어요.」
그러나 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나는
정류장에서 연신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좀더 지체하면 비
행기를 놓칠 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그
흔한 택시 한 대조차 거리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나는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했다. 그때였다. 내 앞에
칠이 벗겨진 낡은 왜건 한 대가 멈춰선 것은. 창문이 열리면
서 헬렌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서 타요!」
나는 정신없이 차에 올라탔다. 헬렌은 빠른 속도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런, 미안해요. 오늘 버스와 택시가 모두 파업에 들어갔
는데, 내가 깜박했어요.」
헬렌은 연신 정적을 울려대며 신호를 무시한 체 쏜살같이
달렸다. 헬렌의 차 꽁무니에 경찰 오토바이 한 대가 따라붙
었다. 하지만 헬렌은 태연하게 계속해서 속도를 높였다. 경
찰의 사이렌 소리와 헬렌의 경적 소리가 묘한 화음을 이루며
거리를 가득 채웠다.
「무서워 할 것 없어요. 그깟 신호나 속도 따위가 인생을
가로막을 순 없지. 대체 인생에서 아낄 게 뭐냔 말이지.」
그 순간, 나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다. 긴박한
추격전 속에서 나는 오히려 미소를 짓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래, 인생에서 아낄 게 뭐란 말인가···
이윽고 헬렌의 차가 공항 터미널에 진입했다.
「뛰어! 굿 바이, 수정!」
나는 변변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정신없이 차에서 내려
달렸다. 출국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창밖으로 헬렌의
경찰과 유쾌한(?)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나
는 알았다. 언젠가 세상이 정해 놓은 규칙과 질서의 바깥으
로 다시 떠나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생에서 아낄 것은 없다. 아니 딱 하나 있다. 그건 아끼고
아껴서 결국 평생 동안 한 번도 써보지 못해야 할 것, 그건
바로 <두려움>임을 헬렌은 아낌없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출처 : 사랑하니까 사람이다(오영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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