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말, 투 아웃, 주자 만루
그는 당당하게 2루타를 쳤다. 베이스를 밟고 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천 개 눈
동자가 일순간 그의 몸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파도처럼 술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거대한 솥단지가 되어 펄펄 끓다가 더 작은 체구의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지
의심한다(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
-김재홍,「메히아」중에서
유년시절, 나의 꿈은 야구선수였다. 그리고 나의 우상은 당
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이만수 포수였다. 다이아몬드의
중심에 우뚝 서서 <파이팅!>을 헐크처럼 외치던 그의 모습
은 영웅 그 자체였다. 자나 깨나 야구에만 골몰하는 아들을
긍휼이 여기신 아버지께선 당시엔 흔치 않았던 유소년 야구
클럽에 나를 보내주셨다. 그때의 기쁨을 어떻게 잊을 수 있
을까.
한남동 근처에 있는 아담한 야구장에서 나는 김 코치를 운
명처럼 만났다.
「반갑다. 그래, 특별히 맡고 있는 포지션이 있니?」
「네, 포수를 시켜주십시오!」
코치는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곧바로
불펜 포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열심히 투수들의 연
습 공을 받아가며 오매불망 경기에 나서기만을 손꼽아 기다
렸다. 그러던 어느 날 코치가 나를 더그아웃으로 불렀다.
「내일 우리 팀 자체 청백전 게임을 할 건데, 네가 청팀 포
수를 맡아보렴.」
「감사합니다!」
비록 정규 경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주전 포수로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 여겼다. 그동안 열심
히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뽐낼 것을 다짐하며 나는 밤새
들뜬 마음으로 잠을 뒤척였다.
이튿날 아침,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엇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막상 포수 마스크를 쓰고 앉아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받으려고 하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10개라면 그 가운데 서
너 개는 받아 내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뒤로 빠뜨리거나 몸
에 맞거나 하는 것이었다. 투수가 와일드 피칭을 해서도 아
니요, 너무 긴장하고 떨린 나머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 옆에선 타자들이 스
윙을 할 때마다 내가 눈을 감기 때문이었다. 즉 다시 말해,
나는 타자가 스윙을 하는 순간 눈을 감는 바람에 공의 정확
한 위치를 순간적으로 놓치고 만 것이다.
1회, 2회, 3회까지 나는 계속해서 공을 빠뜨리고, 미트를
스친 공을 몸으로 막아내는 데 급급했다. 결국 나는 3회가
끝난 후 코치에게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저 대신 다른 선수를 내보내주십시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내 풀죽은 목소리에,
코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끝까지 해봐.」
코치는 짧고 간단하게 말했다.
「코치님, 아무래도 전 포수로서 재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 때문에 저희 팀이 경기에서 질 것 같아요. 저를 빼주세
요.」
「끝까지 해봐.」
「···」
나는 별 수 없이 계속 포수 마스크를 썼다. 그날 나는 무려
20개가 넘는 실책을 범했고, 결국 팀의 패배에 결정적인 기
여를 하고 말았다. 아,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동료 선
수들의 얼굴을 보기가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모두가
돌아간 텅 빈 더그아웃에 앉아 깍지 낀 두 손에 얼굴을 파묻
고 나는 오랫동안 절망하고 있을 때 문득 코치의 따뜻한 목
소리가 머리 위로 들려왔다.
「기준아, 상의를 벗어봐라.」
나는 묵묵히 상의를 벗었다. 어깨부터 배에 이르기까지 커
다란 멍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코치는 시퍼런 자국들에
부드럽게 연고를 발라주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흐르기 시
작했다.
「투수가 던진 공을 네가 연신 놓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
니?」
「타자가 스윙을 할 때마다 자꾸 눈을 감아요. 그래서 순간
적으로 공의 위치를 놓치고 마네요.」
나는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타자가 두렵니?」
나는 눈물을 훔치며 힘껏 고개를 끄떡였다.
「네, 맞아요 확실히 전 타자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네 오른쪽 또는 왼쪽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는
두려움이 없을까?」
「네? 아, 네··· 음, 물론 타자들도 두려움이 있겠죠. 삼진
아웃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병살타를 칠지도 모른다
는 두려움···」
「그렇단다. 타자들은 자신이 출루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는 두려움을 늘 갖고 있지. 그렇다면 투수들은 어떨까? 투수
들도 마찬가지란다. 결정적 순간에 홈런이나 적시타를 맞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볼넷을 허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역전 결승점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을 갖고 있겠지.
야수들도 마찬가지겠지? 타구를 뒤로 빠뜨릴지 모른다는 두
려움, 악송구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햇빛이 너무 눈부
신 나머지 뜬공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코치는 따스한 손길로 내 상의를 다시 천천히 입혀주었다.
「코치인 나도 두렵긴 마찬가지지. 경기에서 지면 선수들
의 낙담을 어떻게 위로하고 사기를 다시 진작시켜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 벤치에서 작전을 지시했을 때 성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잘 던지고 있는 투수를 교체했을 때 경
기를 망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심판들도 마찬가지란다.
결정적 순간에 오심을 저지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지. 하다못해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도 두려움을 갖기는
마찬가지란다. 내가 응원하는 팀, 응원하는 선수들이 혹여
실수라도 저지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갖게 마련이지.」
나는 상의의 단추를 채우며 코치의 말에 귀 기울였다.
「자, 그러니까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셈이란다. 그런데 두렵다고 해서 경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될까? 경기는 엉망이 되
고 말겠지? 타자는 눈을 감고 스윙을 하고, 투수는 눈을 감
고 공을 던지고, 심판은 눈을 감고 판정을 하고···」
코치와 나는 글러브와 공을 챙겨 더그아웃에서 나와 홈플
레이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방금 전까지 활기에 넘치던 구
장이 평온한 저녁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그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내게 포수석에 앉을 것을 주문하고는 코치는 투수석
으로 걸아갔다. 그러고는 내게 큰소리로 외쳤다.
「9회 말,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이다. 현재 우리
팀은 4 대 3으로 한 점 앞서 있고, 주자는 만루 상황이다. 자,
이제 마지막 공 하나가 승부를 결정한다!」
코치는 힘차게 와인드업 하면서 힘차게 공을 뿌렸다. 공이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수많은 배트가 그 공을
치기 위해 파노라마처럼 스윙을 시작했다. 나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공이 내 미트에 팡!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스윙 아웃! 게임 오버!」
관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고, 투수 마운드에서 코치가
내게 곧장 뛰어왔다. 나는 그를 얼싸안았다. 코치가 내 귀에
속삭였다.
「잘했어, 기준아! 바로 그거야, 명심해라, 눈을 뜬 자가 언
제나 이긴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코치가 내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것 같았다.
「두려워서 눈을 감는 게 아니란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공보다 두려움이 더 빨리 달려드는 거란다. 눈을 뜨고 있는
한, 결코 두려움은 그 어느 것도 이기지 못한단다. 비단 야구
뿐이 아니란다. 앞으로 네 앞에 펼쳐질 세상의 많은 일 또한
마찬가지란다. 늘 눈을 뜨고 있거라. 하다못해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어야 해!」
나는 활짝 웃으며 코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비로소
나는 나의 영웅인 이만수 포수가 왜 늘 홈플레이트 앞에 우
뚝 서서 우레 같은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바로 <두려움? 너 따위는 두렵지
않아!>라는 자신감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동료선수들에게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눈을 감고 피하지 않는 한 두려움이란 가장 길들이기 쉬
운 야생마와도 같지.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
니?」
「네, 코치님!」
그날 이후 나의 삶은 뭔가 뚜렷한 변화를 보였고, 그 변화
속에서 나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피
하지만 않으면, 두려움이란 사실 그다지 두려운 게 못 된다
는 깨달음을 나는 살아가면서 천천히 체득할 수 있었다. 인
생의 시련이 닥칠 때마다 나는 9회 말, 투 아웃, 투 스트라이
크 스리 볼, 주자 만루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내 인생
을 가름하는 결정구 하나를 정확히 받아내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파이팅!>을 외치고 또 외쳤다.
<승리는 두려움을 없앤 자의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길들
인 자의 것이다.>
나는 오늘도 명포수가 되기 위해 눈을 뜬다.
출처 : 사랑하니까 사람이다(오영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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