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이 되라
남태평양의 사나운 태풍도 작은 나비의 날개짓에서 시작된다. 기상 캐
스터가 위성 사진을 보여 주면서 태풍의 이동 경로를 설명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설명을 하면서 빠뜨리지 않는 것이 태풍의 눈이 위치
한 지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태풍은 거대한 자연의 힘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지상의 존재들을 뒤집어 버린다. 거목이 성냥개비처럼 나뒹굴고
견고하다고 믿었던 집채마저 낙엽처럼 무기력하게 휘날리고 만다. 인
간의 교만과 오만이 삽시간에 무참해지며 삶과 죽음이 그리 멀리 떨어
진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자연은 인내심 강한 큰형님 같다. 웬만한 충격에도 꿈쩍하지 않고 참
고 참고 참다가 폭발하는 심지 깊은 큰형님 같다. 인간이 만드는 재앙
인 전쟁은 영웅을 낳고 인간을 교만하게 만든다. 승자에게는 승리감의
되취를 주고, 패자에게는 분노와 울분, 또 다른 재앙의 씨가 인과법에
따라 내밀히 자라게 한다. 그러나 자연의 재앙은 공평하다. 승자도 패
자도 없는 공평한 처분에 인간은 모처럼 겸허해진다. 잘잘못을 따질 표
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동등하게 겸허해진다. 그런 교훈을 가르치기 위
해 자연은 가끔씩 불가항력의 재해를 인간에게 고통스런 선물로 제공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선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제공한다. 수
시로 힘을 과시하듯이 장난치지 않는다.
우리가 겪어야 하는 더욱 빈번한 재앙은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것들
이다. 자연 재해라는 것을 찬찬히 따져 보면 자연을 함부로 다룬 결과
로 빚어지는 것들이 많다. 인간은 말없는 청산이라고 함부로 훼손하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않고 흔들어 대고 뭉개 버렸다. 가히 인제(人災)가
천재(天災)를 능가하는 시대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의 정체
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과오가 그 원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재앙과 고통의 원천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엄청
난 시간과 아픔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는
지독할 정도로 인색하다.
실천의 문제까지는 나 역시 자신이 없지만 지난날 큰스님으로부터
들은 법문을 궁행(躬行)해야겠다는 의지만은 견고하다.
용감하기로 이름 높은 한 장군이 평소 애지중지하던 골동품 찻잔을 꺼내어
감상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만지다가 갑자기 찻잔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아이쿠!"
얼른 손으로 찻잔을 잡은 장군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천만 대군을 이끌고 죽음의 전쟁터를 들락거리면서도 한 번도 떨린 적이
없었는데, 어이하여 이 찻잔 하나로 이토록 놀란단 말인가?"
장군은 미련 없이 찻잔을 깨어 버렸다.
당나라의 조주(趙州) 스님에게 한 제자가 찾아와서 물었다.
"스님,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럼 내려놓거라."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내려놓겠습니까?"
"그렇다면 쥐고 있을 일이지."
어려운 상황일수록 관념의 세계, 무념무상의 세계에 빠져 보는 것도
필요하다. 애지중지라는 애착이 스스로의 삶에 굴레를 만들고 자신은
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애증의 마음 하나 때문에 천만 대군을 호령하
던 장수가 조그만 찻잔이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보고 등골이 오싹해
진 것이다. 언젠가 깨어질 찻잔을 부여잡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분노와
울분 속에 허덕여야 하는 것이다.
비웠다는 것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아직 비운 것이 아니다.
비웠다는 관념 자체가 자기 과시가 아닐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쥐고 있는 것이 더 정직하다는 큰스님의 가르침이리라.
태풍의 눈처럼, 소용돌이 속에도 정적을 유지하는 지점이 있다. 그
고요의 지점을 찾아 침잠하는 지혜, 자신이 앉은 자리를 정적의 지점으
로 만드는 지혜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닐까? 부화뇌동
하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다. 어렵다, 어렵다 하는
탄식이 비명처럼 주위에 분분하다. 이런 때일수록 조용히 단좌하여 정
적을 찾자. 그것만이 내일이 저력이 될 것이다. 태풍의 눈이 되어야 용
솟음치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천천히 걷는 자의 행복(김윤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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