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음악들/클래식 음악

브람스 단 하나의 사랑 클라라

doggya 2007. 5. 28. 11:36

단 하나의 사랑 클라라

한 여인을 사랑한 예술가 요하네스브람스

 

 

하네스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사랑을 모르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너무도 열정적인 사랑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사랑을 평생 갈구하였으며 사랑을 지켜나간 너무도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특히 그의 사랑 중 클라라 슈만과의 사랑은 그의 예술가적 인생의 거의 대부분의 영감을 얻게 한 사랑으로 그가 클라라를 만난 순간이 예술가로서 새로 태어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브람스 클라라를 만나다

브람스가 클라라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수만의 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브람스가 함부르그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나서 슈만에게 그의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슈만은 그의 작품을 개봉도 않은 채 반송했고, 브람스는 그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그는 요하임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으나 그 후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본 결과 슈만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용기를 내어 그를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오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브람스으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그 후 브람스는 11월 3일까지 슈만 가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당시 슈만 부부의 일기에는 하루도 그의 작품에 관한 찬사가 없는 날이 없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관한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특히, 당시 피아니스트로서 서른 네 살이던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정점에 이르러 있었으니만큼, 젊은 브람스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능에 매력을 느꼈음은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모의 마음을 '존경, 경애'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며 '슈만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그 증거로 [피아노소나타 작품2]를 클라라 부인에게 헌정하고, 또 창작에만 그의 온 정열을 쏟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다시금 진정한 사랑으로 피어나는 전환기를 가지게 된다.

 

제1악장 Allegro con brio

Symphony No.3 in F major Op.90

 

우정과 존경은 사랑으로 변하고

1853년 슈만이 정신병이 악화되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당장에 슈만 부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1854년 3월 4일 슈만은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클라라를 도와 절망에서 그녀를 구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7번째의 아이를 임신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새로운 [피아노 3중주곡 제1번](작품8)을 들려주고 이윽고 막내아들이 태어나자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슈만의 주제(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곡)에 의한 변주곡](작품9)을 작곡했다.이 처럼 그녀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우정과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갔고, 마침내 그녀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의 불타는 사랑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종종 편지를 통해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지만, 클라라는 매정하게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만을 상기시켰고 자신은 '오직 모성적 우정'만을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클라라 역시 브람스와의 관계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느끼고 많은 기쁨을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브람스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녀는 그토록 끔찍한 재앙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브람스의 영혼의 내부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와 자신이 음악가로 회복하기를 바라는 은인이요 친구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에게 충실해야겠다는 소망 사이에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폭풍과 같은 심경은 그가 1854년 말에 작곡하기 시작한 어둡고 열정적인 발라드들 속에 반영되고 있다.

 

남아있는 자를 위한 '레퀴엠'

당시 착상한 광포한 <피아노 4중주 C단조 작품 60>의 도입부를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당시의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주저 없이 토로하고 있다. "자, 이제 막 자신을 쏘려고 하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해 보게. 왜냐하면 그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느니 말야." 하지만 다행이도 그를 이런 악몽과 같은 내면의 싸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즉 1856년 7월 마침내 슈만이 죽은 것이다. 슈만 사망 이후 클라라는 남겨진 7명의 아이들의 양육과 남편 슈만으 ㅣ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서 살아가는 의미, 남겨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미망인 클라라 슈만으로 변모해갔다.
한편 브람스도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식이 커갔다. 그런 중에 그의 마음에 문득 떠오른 것이 '독일레퀴엠'이라 불리는 '무'(無)-'체험'(Gar Nicht)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다시 말하면 '클라라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 출발점부터 카톨릭의 그것과는 달랐다. 가톨릭의 레퀴엠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 레퀴엠의 근본 사상은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다.
이처럼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슈만이 죽은 후 침착하나 더욱 깊이 있는 사랑의 공감으로 변해갔고, 외부의 장애가 사라지고 그가 자유롭게 클라라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그의 정열은 차분히 가라앉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되어 갔다. 물론 긴 인생 속에서 다른 사랑의 향기를 느끼게 한 여성이 없었을리는 없지만, 결국 어떤 여성도 클라라와 떨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힘. 모든 열정이 창작에 모아졌다. 클라라가 189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후 뇌졸중으로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브람스는 피할수 없는 '죽음'의 예감을 가졌고, 예술가로서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서 성경 말씀에 의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생일인 5월 7일 완성하였다. 이 네곡에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을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과 함께 실었다.
이 곡들은 클라라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 엄숙한 사랑의 찬가이자 자기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살았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클라라의 죽음을 안 것은 그 날부터 13일 후의 일이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그녀의 죽음을 요약했다. 이듬해 4월 3일 대작곡가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대구문화6월호에서 발췌

  

 

♧ 낭만주의자로서의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은 낭만주의를 충분히 꽃피우는데 누구보다 공이 큰 작곡가이다.
어느 때인가 한 비평가가 "왜 당신은 정통 소나타를 쓰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니 슈만은 격한 어조로  "어떤 사상이든 이미 형성되어 있는 형식에 꼭 들어맞아야 한다는 말이오? 모든 예술작품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의의와 형식이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내용과 사상이 형식을 결정할 뿐 그 역(逆)은 아니오!" 
라고 답을 했으며 이런 그의 주장은 분명 낭만주의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슈만도 '피아노 소나타'라고 이름 붙은 곡을 세 곡 썼지만 환상적이고 정열에 넘쳐 종래의 소나타 관념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사실 슈만은 소나타나 교향곡 등의 거창한 구성을 가진 곡에서 진가를 발휘하기보다는 피아노 소품이나 가곡 등에서 타고난 천재성과 낭만성을 발휘했습니다.  교향곡은 클라라와 결혼한 후 아내의 끈질긴 권유를 받고서야 겨우 손을 댄 분야이니 슈만의 행보의 주축이 어디에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슈만의 부계에는 유전적인 정신적 질환이 있었던 듯 아버지가 정신병으로 사망한데 이어 누이도 19세 때 자살했으며, 슈만 역시 최후를 정신병원에서 맞이 했다. 그를 몹시도 괴롭혔던 환청, 환각, 망상 등의 이상체질과 격정에 빠지기 쉬운 과민한 기질이 오히려 변화와 다양성, 때로는 역설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적 예술 표현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도대체가 낭만주의란 그다지 건강한 이즘(ism)인 것 같지는 않다.

 

슈만은 스스로를 가리켜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중간에 위치한 낭만주의의 절대적 신봉자'라고 말했다.

 

♧ 어린 시절의 슈만

 

독일 츠비카우에서 4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세 때부터 거의 자기 스타일로 피아노를 치거나 작은 무곡풍의 곡을 써서 음악적 소양이 풍부함을 나타냈다.
12세 때 <시편 제150번>을 작곡하였으며, 스스로 조직한 아마추어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초연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서점을 하고 있어서 일찍부터 문학에 심취했고, 이것이 훗날 그가 음악 평론가로서도 일가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슈만이 16세 때에 미망인이 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문학이나 음악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아들을 라이프치히 대학의 법과로 보냈다.
그러나 그 도시는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에는 알맞지 않은 곳이었다. 음악 활동이 너무나도 활발했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슈만은 차츰 음악에 깊이 관계하여 친구와 실내악을 즐기거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연주회에 자주 다녔으며,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작품을 가까이했다. 또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법과교수 티보가 음악론저서까지 펴낸 사람으로, 음악 실천면에서도 학생과 함께 팔레스트리나의 고전대위법을 연구하는 서클의 지도자였던 점도 슈만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결국 슈만은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고, 피아노 교수 비크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리고 비크 교수의 집을 드나드는 동안 슈만과 비크 교수의 딸인 클라라와의 사이에서는 어느새 사랑이 싹터 갔다.

 

♧ 슈만의 정열적인 사랑

 

비크 교수는 두 사람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으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비크에 대해 젊은 두 사람은 부친의 허락없이 결혼할 수 있도록 재판으로까지 몰고 갔으며, 40년 9월 12일 겨우 결혼을 했다. 아내 클라라와의 정열적인 연애는 음악사상 유명한데, 이러한 인생의 큰 전환과 때를 같이 하듯 슈만의 창작은 피아노음악에서 <가곡의 해>라 불리는 성악작품으로 집중되어갔다. <리더크라이스> <시인의 사랑> <여자의 사랑과 생애>를 비롯해 <미르테의 꽃>등 가곡집의 걸작이 이 해에 완성되었다.  그 뒤에도 41년 <교향곡의 해>, 42년 <제1차실내악의 해>, 43년 <오라토리오의 해>라고 하는 집중적·체계적인 창작자세를 보였다. 슈만이 활동했던 장소를 보면 본거지는 44년까지의 라이프치히이지만, 44년 말부터 50년 9월까지 드레스덴시대, 그리고 50년 9월부터는 뒤셀도르프시대가 된다. 마지막 말년의 2년간은 청각이상과 환각증상에 시달리면서 본 교외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서 혼자서 살았으며, 56년 7월 29일 46세로 생애를 마쳤다.

 

♧ 슈만의 음악에 대한 열정

 

슈만의 음악에의 정열은 대단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리라 굳게 마음먹고 하루 7시간씩 연습하며, 실력 연마에 힘을 쓰던 슈만은 24세 때 갑자기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손가락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기에 이르렀고, 고민끝에 자신이 발명한 피아노 숙달 속성기를 손가락에 끼우고 더욱 맹렬히 연습한 그는 '불굴의 예술혼'이라는 칭찬을 들었지만, 결국 연주자로서의 희망을 버려야만 했다.

 

절망한 그는 작곡, 지휘, 평론의 길을 택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슈만의 이름을 높이게 된 셈이 되었다. 특히 음악 비평가로 거의 만점에 가까웠던 슈만은 쇼팽이나 브람스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을 세상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10여년에 걸쳐 혼자 힘으로 '음악 신보'를 발행한 그는 훌륭한 평론을 많이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슈베르트, 쇼팽, 브람스 등을 이 영광스러운 무대에 소개했던 것이다. 그가 빈을 여행할 때 슈베르트의 형집을 방문했고, 거기서 남겨진 악보의 산더미를 보고 감격하며, 정리했던 곡이 유명한 '제 7번 C 장조'이라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슈만은 생전에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존재가 아니였고, 그의 음악 또한 썩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살아있는 동안 별로 햇빛을 보지 못한 작곡가 중에서도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슈만입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아내 클라라와 동행 연주 여행을 할 때면 사람들이 클라라의 음악성만 인정해 주어 그가 많이 좌절했다고 한다.

 

▷ 주요 작품 

 

피아노곡 ; "피아노협주곡", "사육제", "환상소곡집", "어린이의 정경""나비", "교향곡 연습곡",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에 의한 연습곡" 

가곡 ; "하이네의 시에 의한 가곡집",  "여자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 "유랑의 무리(Zigeunerleben)",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의한 가곡집", "미르테의 꽃", "Myrthen" 

교향곡 ; "피아노 제1번, 2번", "제3 라인 교향곡", "첼로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 

실내악 ; "현악4중주곡", "피아노4중주곡", "피아노5중주곡" 

오페라 ; "제노베나" 

합창곡 ; "Paradies und die Peri" 

논문 및 저서 ; "젊은 길", "음악평론집",  "R.Schumanns Jugendbriefe"

 

♧ 클라라 슈만 Clara Josephine Schumann (1819-1896)

 

독일 피아니스트·작곡가. 라이프치히 출생. 유명한 피아노교사 F.비크의 장녀이며, 슈만의 아내이다. 리스트로부터 천재소녀라고 격찬받았다. 1840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슈만과 결혼하여 잠시 활동을 쉬었다. 슈만과 쇼팽 해석에 뛰어나며 그들의 작품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슈만이 죽은 후 브람스의 작품 소개에 힘썼고, 특히 슈만과 브람스의 연주해석은 오늘날까지 하나의 규범이 되어 있다. 피아노독주곡 등 많은 작품이 있는데, 슈만의 <<사랑의 봄>에서 딴 12시(詩, 1841)>의 제2·제4·제11곡은 그녀가 작곡하였다. 남편의 서간집과 작품전집을 편집했고, 말년에는 프랑크푸르트음악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

 

남녀의 애정과 정신과 육체의 분리에 관해 유럽인, 특히 그 중에서도 독일인은 분명한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브람스의 경우 독일인의 상식으로는 판단 되니 않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거의 모든 창작의 초안을 클라라에게 보여준 후 그 의견을 듣고 나서 초연을 했고 출판도 했다는 사실이 엄연하게 남아서 전해지고 있는 이상 그의 음악을 듣고 즐기는 우리들로서는 클라라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다. 브람스의 생애를 더듬어 갈 때, 그의 인생 선택은 항상 내면의 정열(金색 빛)을 이성이라는 테두리(그을린 銀)로 굳혀서 걸어왔다. 바로 감정의 격류를 형식이라는 테두리 안에 한정시킨 신고전주의 작곡가의 삶이다. 왜 그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억제하고 학대해야 했던가. 사람은 날 때부터의 기질에 덧붙여서 인생의 매듭매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벤트로 인생관이 수정된다.

 

부친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모친에게서 성실한 성격을 계승한 브람스는 코세르, 마르크스 젠이라는 유능하고 다정한 스승에 의해 재능을 갈고 닦아 심성이 풍부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학교 교육속에서 자라난 경건한 신앙과 애국심은 그의 중심에서 평생동안 불탔으며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분방했을 10대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기비판 때문에 작품을 찢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던 청년, 언제나 자신에게 엄격했던 그도 주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외로 정다웠다. 브람스는 평생토록 그러한 자세로 일관했던 사람이다.

 

1853년 9월 30일, 친구 요아힘(바이올리니스트, 하노바 관현악단 콘서트 마스터)의 권유로 뒤셀도르프의 로베르트 슈만 가의 현관에서 섰던 일이 브람스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바꾸었다기 보다는 상상할 수 없다는 인생의 출발점이었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슈만은 젊은 인재가 나타난 것을 기뻐하며 한달 동안 그를 가족 속에 두고 그의 작품을 듣고는 '천재다!'를 연발했다. 존경하 는 거장 슈만, 그의 아내 클라라, 그리고 여섯 아이들과 슈만 가를 방문하는 젊은 동료음악가들과 함께 지냈다. 무엇보다도 재능이 풍부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스스로의 마음을 일심으로 부정하면서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모의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간다. 사모의 마음을 '존경, 경애'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며 '슈만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그 증거로 「피아노 소나타 작품 2」를 클라라 부인에게 헌정하고, 또 창작에 전념하는 브람스였다.

 

1856년 슈만이 사망한다. 클라라에게 있어서는 인생 최대의 슬픈 날이었고, 브람스에게는 정신적 지주와 족쇄(?)를 동시에 잃어버린 망연자실의 날이었다. 슈만의 죽음에 의하여 유발되었다고 하는 작품 「매장의 노래 작품 13」이 탄생한다. 미하엘 바이 세의 힘찬 독일어 텍스트에 의해 '죽음과 부활'이라는 영원한 테마에 고무된 브람스는 루터파의 코랄을 바탕 삼아 관악기와 팀파 니의 반주를 덧붙인 혼성 5성부 합창으로 만들었다. 또한 슈만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무반주 혼성 합창곡 「2개의 모테 트 작품 29」는 코랄 선율을 정성들인 푸가를 이루는 아름다운 곡으로, 신의 자비에 매달려 신의 위로를 구한다는 브람스의 사상 이 뚜렷하게 부각된 작품이다. 그리고 독일 낭만파 종교 음악의 최고 걸작 「독일레퀴엠」은 분명히 이 두곡의 연장선상에 온다고 말할 수 있다.

 

브람스의 음악을 논할 때 많은 사람이 즐겨 사용하고 싶어하고, 또 사용해 온 표현은 '표면을 그을린 은(銀)과 같은…'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브람스의 중후한 음색은 '그을린 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찰나적 금빛으로 빛나는 음의 빛깔 또 한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19세기 종교음악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그의 '독일 레퀴엠'(작품 45), 만년의 가곡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 121)등 '그을린 은'의 대표적 작품이랄 수 있는 것에서조차 그 한편엔 빛나는 금빛의 음색이 돋보인다.

 

▷ 경애하는 '부인'에서 나의 '클라라'에게로

 

1855년 가을에 클라라, 요아힘, 브람스 등 세 사람의 합동연주회를 각지에서 개최하여 슈만일가의 생계를 돕기도 한 브람스는 당시 부인보다 14살 연하인 22살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브람스와 클라라 사이에 편지의 교환이 시작된다. 그후 40년 에 걸친 음악사상 보기드문 우정의 편지가 오고간다. 호칭은 '경애하는 부인'에서 '나의 클라라에게', 경칭의 '부인'(Sie)에서 친밀한 표현인 '당신'(Du)으로 변화해 가지만, 또한 '사랑하는 친구여'라고 우정을 지키려는 노력이 애처롭게 담겨져 있다. 이 편지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현실세계 속에서 클라라를 연모하는 브람스와 현실도피의 차원에서 브람스를 생각하는 클라라의 모습 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사랑을 꿈꾼 브람스에게는 클라라를 연모하면 할수록 '사랑해서는 안되는 여성을 사랑하고 말았다.'는 정신적 고뇌가 커. 클라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창작의욕까지 점차 꺾여나갔다. 시작했던 작곡도 도중에 그만두고 대위법 학습이라는 자신에게 부과된 일에 채찍을 가해야만 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1856년 7월 29일 슈만 사망이후 클라라는 남겨진 7명의 아이들, 남편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서 살아가는 의미, 남겨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미망인 클라라 슈만으로 변모해 갔다. 한편 브람스도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식 커갔다. 그런 중에 그의 마음에 문득 떠오른 것이 '독일 레퀴엠'이라 불리는 '무'(無)-'체념'(Gar Nicht)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무렵 슈만의 죽음으로 유발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매장의 노래'(작품 13)이다. 미하엘 바이세의 강렬한 독일어텍스트 를 보고 '죽음과 부활'이란 영원한 테마에 사라잡힌 브람스는 루터파의 코랄(Choral)에 기초하여 관악기와 침파니의 반주를 더한 혼성 5부합창을 마무리했다. 또한 슈만의 죽음과 관련있다고하는 무반주 혼성합창곡 '2개의 모테트'(작품 29)는 코랄 선율이 밀 도있는 푸가로 형상화된 아름다운 곡으로서 신의 자비에 의지하고 신에게 위안을 구한다는 브람스의 사상이 확연히 드러난 작품 이다. 그리고 독일 낭만파 종교음악의 최고 걸작 '독일 레퀴엠'은 확실히 이 두 곡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과 부활 - 이것이야말로 긴 세월 동안 브람스의 뇌리와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킨 테마였다. 슈만의 사후 10년간 갈등을 계속했던 테마의 결실, 그것이 '독일 레퀴엠'이었던 것이다. 성서를 항상 곁에 두고 애독했던 프로테스탄트, 브람스. 그는 '현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다시 말하면 클라라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 출발점부터 가톨릭의 그것과는 다르다. 가톨릭의 레퀴엠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객관적인 것이고 최후의 심판이란 부활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 레퀴엠의 근본사상은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었다. 남겨진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하여 그 생존자들에게 성서의 말을 빌어 위안을 주 고자 한 것이 그의 레퀴엠이었다.

 

슈만의 죽음, 모친의 죽음, 그리고 많은 이웃들의 죽음과 만난 브람스는 독일인으로서 루터의 독일어 성서 속에서 신앙의 원천 을 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시구(時句)를 선택했던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걸어온 종교생활과 종교관 그리고 클라라를 사모하는 인간 브람스의 숨김없이 진솔한 모습이 거기에 투영되는 것이었다.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독일 레퀴엠'을 산출한 브람스의 신 앙심은 인생의 어떠한 고난도 음악으로 변용할 수 있는 신이 주신 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클라라를 사모하며 돌보는 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산 브람스. 물론 긴 인생 속에서 다른 사랑의 향기를 느끼게 한 영성이 없었을 리는 없지만 결국 어떤 개성도 클라라와 떨리지게 할 수는 없었다. 클라라만이 평생 브람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던 유일한 여성 이었다.

 

인간의 마음의 변천-인생의 다양한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걸어가는가는 그 사람의 죽음에 의해 명백해지는 것이지만 창작가로서의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 가장 만년의 종교가곡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121)를 통해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의 전 부를 쏟아넣은 '유언장'을 후세의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클라라가 189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후, 졸증으로 쓰러지자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으로 이 4개의 가곡을 만들어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을 실었다.

 

전체적인 텍스트를 성서에서 구한 이 4개 가곡의 제1곡은 인생은 동물의 삶과 같이 공허한 것이나 그 유일한 구제는 일에 힘쓰 는데 있다는 인생의 의미를 노래했으며, 제2곡에서는 죽음으로 고통을 면제받은 자의 행복을,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모르는 자를 찬양한다.

 

제3곡에서는 행복한 인생을 걸어온 자에게 닥쳐온 죽음의 괴로움과 불행한 인행을 걸어온 자에게 닥쳐온 죽음의 기쁨을 대조적 으로 노래하고, 제4곡에서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영원함을 설명,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신앙에도 우선하는 가치 임을 유장히 노래하고 있다. 이곡들은 클라라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인류의 모든 사람에게 보낸 엄숙한 사랑의 찬가이자 자기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살았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럼 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브람스의 마음 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힘, 모든 열정이 창작에 모아졌다. 사는 것을 항상 신중히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실현할 수 없었던 그 인생의 정열은 작품 속에서 비로소 실현되었으며 개인을 초원한 힘이 되어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브람스의 마음이 걸었던 발자취는 클라라 슈만이 중심이 된 사랑으로부터 승화하여 성서의 세계로 옮겨갔던 것이다.

 

♧ 브람스의 마지막 생애

 

클라라를 생각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브람스. 물론 긴 인생 가운데 어슴푸레한 연정의 향기를 풍겼던 여성도 없지 않았지만 , 결국 어떤 개성도 클라라가 될 수는 없었다. 클라라만의 브람스의 마음 속에 평생토록 계속 존재했던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바드이슈에서 쓴 말년의 음악 속에 흐르는 아름다운 정감, 그 속에서 작곡가가 조용하게 말해주는 부드러운 '브람스적인' 분위기를 맛볼 때 청년 시절의 동경이 선율에 어우러져 아름답게 수놓아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역시 클라라의 존재 없이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896년 브람스는 봄볕 따스한 바드이슐에서 클라라가 뇌졸증 발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많은 친구들을 통해 죽음 뒤에 전해진 이 소식은 브람스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예감을 주었다. 인간 마음의 변천, 인 생의 갖가지 문제를 어떤 모양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걸어갔는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죽음에 의하여 명확하게 나타난다. 창작가로서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서 성경 말씀에 의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생일인 5월7일 완성하였다. 클라라의 죽음을 안 것은 그 날부터 13일 후의 일이었다. 이듬해 4월 3일 대작곡가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20세에 서 64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태반을 지내는 동안 브람스의 마음을 차지했던 것은 클라라의 존재였다. 거기서, 생겨나는 힘의 모든 것 에너지의 전부를 창작에 쏟았다.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인생을 서투르게 살 수 없었던 그의 인생몽상은 작품 속 에서만 실현되었고, 개인을 초원한 능력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감명과 감화를 주고 있다.

 

브람스 마음 궤적은 클라라 슈만을 축으로 삼고, 사랑에서 출발하여 성경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