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튼튼히 해서 죽지 않으면 된다
중학교 1학년 때 전학을 갔는데 그 학교에 도서실이 있
었다. 마음 둘 곳 없어서 괴로웠던 그 시기의 대부분을 나
는 도서실의 어두운 마루 위에서 보냈다. 봄날의 어지럼증
과 여름날의 무기력증이 빈혈 때문에 생긴 생리현상일 뿐
이라는 걸 나중엔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게 생의
부조리 탓인 줄 알았다.
지은 지 오래된 도서실 건물에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
았다. 검은 마루와 회색 벽 속에 《인간의 굴레》《황야의
이리》같은 소설들을 읽었다. 어둑한 저녁 현기증을 느끼
며 일어설 때 소설 속의 황량하고 격정적인 세계가 미묘한
끌림으로 다가왔다.
막 사준기에 접어든 그때 남독과 난독으로 많은 시간
을 보냈다. 《실낙원》과 《파우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서》가 그 시기에 내팽개쳐졌다. 《죄와 벌》《마의 산》《이방
인》《변신》은 끝까지 붙들고 있었지만 얻은 건 별로 없었
다. 중학교 때의 수준에 맞지 않는 잘못된 독서 탓에 몇몇
명작들은 그 향기를 아직도 가까이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도서실 사서 언니가 추천해 준 책으로는 《폭퐁의
언덕》과《제인 에어》《주홍글씨》《작은 아씨들》이 있었다.
좀 자존심 상해하면서, 왜냐하면 이미 그 책들을 다 읽었
다고 생각했으므로(다이제스트의 폐해란!) 마지못해 받
아들었는데 그만 《제인 에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11월
의 나무 같은 제인 에어가 책 속에서 당차게 말했기 때문
이다.
"나는 그곳의 어느 누구와도 통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
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그들
을 사랑하지 않았다."
독선과 위선에 맞서며 어린 고아 소녀는 목사 앞에서
<시편>이 재미없다고 말하고 외숙모에겐 자기 살붙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제인의 강단은 목사가 겁주
면서 "지옥의 구덩이에 빠져서 영원히 불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때 주눅 들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게 한다.
"몸을 튼튼히 해서 죽지 않아야 하지요."
스스로를 평생 거짓말 한 번 하지 않고 바르게 산다고
믿는 목사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선점
한 천당이라면 못 가도 그만이라고, 그런 사람들이 위협의
수단으로 삼는 지옥이라면 안 가기 위해서 건강하게 오래
살 수밖에 없다고 아주 오래전 그때 제인 에어가 허약한
내게 가르쳐 주었다.
출처 : 견디지 않아도 괜찮아(글 김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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