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밥상 따끈한 마음
나는 마지막으로 앞쪽 출입문에다 자물통을 물리고 교실을 나왔
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반 영옥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다. 나중에 내가 퇴근을 하며 무심결에 학교 쪽을 돌아보
는데 영옥이가 저기 있었다.
왜 아직 집엘 안 갔느냐고 물었지만 영옥인 대답하지 않았다.
집이 많이 어려워 공납금 내는 일이 반에서 꼴찌일 뿐, 문제를 일
으킨 일이 없는 조용하고 평범한 아이였다. 할말이 있는 거냐고
부드럽게 물었지만 영옥인 웃기만 했다. 방학을 잘 보내라고 나는
말했고 영옥은 목례로 답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투명하던 하늘이 어느새 낮게 내려와 있는 걸 보며 나는 눈을 기
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바깥은 추웠지만 자취방은 아랫목이 따끈
따끈했다. 일단 내일 아침 일찍 움직이기로 작정하고 나는 아랫목
에 엎드려 책을 뒤적거리다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떠보니 방안이 캄캄햇다. 무슨 소리가 들
리는 듯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몰라 잠시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이 분명히 방안에 계실 텐데, 잠이 드셨나아···?"
주인집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고 내가 열려는데 바깥에서 먼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주인 아줌마 뒤편에 뜻밖에도 우리 반
영옥이가 서 있었다. 파랗게 언 손에 상보를 씌운 큰 양은쟁반을
들고.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5리 길은 될 것인데···."
주인집 아줌마가 눈을 쓸면서 혼자말로 영옥이를 가상해 했다.
아무리 들어오라고 해도 영옥인 들고 온 양은쟁반만 내 방에 들
이밀고는 도망가듯 냅다 뛰어가 버렸다. 받아든 양은쟁반은 언 듯
이 찼다. 양은쟁반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 한 주발, 김칫국,
깍두기, 건파래무침, 고추장에 박았던 무장아찌, 그리고 양은수저
한 벌.
김칫국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깍두기 국물이 넘쳐 양은쟁반은
지저분했다.
영옥이가 쟁반에 얹어 놓은 종이쪽지에도 깍두기 국물이 번져
있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영옥 올림.>
나는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들판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눈은 다
시금 내리는 중이었다. 저만큼 뛰어가는 영옥이를 나는 부르지 못
했다.(박진숙/방송작가)
출처 : 작은 이야기(정채봉 · 류시화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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