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육성회비

doggya 2010. 8. 24. 18:12

 

 

육성회비

 

 

 

               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남자 담임선생님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까지 육성회비 안 낸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 봐."

 그 순간 내 가슴속에 돌덩이 하나가 쿵 하고 떨어졌다. 나는 몹시

긴장했다. 여러 번 독촉을 받았지만 수업료로 내는 육성회비를 미처

내지 못하고 있던 탓이었다. 나는 먼저 주위를 둘러보았다. 육성회

비를 못 낸 아이가 있기를 바랐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는 아무

도 없었다. 끌탕을 하다가 결국은 나 혼자 일어났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 앞에서 너무도 창피했다. 그런데 잠시

후, 옆 분단에 앉아 있던 영수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였다. 영수의 몸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의 짧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들 들어 봐."

 "······."

 "어서 고개를 들어 보라니까."

 담임선생님의 호통 소리에 나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육성회비 언제까지 낼 수 있어?"

"······."

 나와 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영수는 쩔쩔매하며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다. 내 얼굴도 동백꽃

잎처럼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그때 다시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

가 들려왔다.

 "내일까지 육성회비 꼭 가져와. 그렇지 않으면 엄마를 모셔오든

지. 알았어?"

 "네······."

 "그리고 오늘 교실 청소는 니들 둘이 해."

 수업이 끝나고 나는 영수와 단둘이서 교실 청소를 하기 위해 남았

다. 함께 집에 갈 형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형이 복도 한쪽에서 두 손을 든 체 꿇어

앉아 있었다. 순간 내 가슴에 잔물결이 일었다. 형네 담임선생님은

형에게 다그치듯 묻고 있었다.

 "내일까지 육성회비를 내든지 아니면 엄마를 모시고 와. 알았어?"

 "네."

 "너희 아버지 뭐하셔?"

 "고물상 하시는데요."

 형이 눈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나는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청소를 마치고 영수와 나는 교실 문을 나섰다. 창밖으로 하얀 목

련꽃잎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영수야, 너는 육성회비 언제 낼 수 있어?" 

 "······."

 "내일도 우리 둘만 남아서 청소하겠다. 그치?"

 "하면 되지 뭐."

 영수는 빙긋이 웃어 보였다.

 나는 며칠 뒤에야 알았다. 영수가 벌써 육성회비를 냈다는 것

을······.친한 친구가 혼자 서 있는 게  창피할까 함께 일어났고, 함께

청소까지 했다는 것을······.

 

 

출처 : 행복한 고물상(이철환)

 

 

 

 

'사랑방 > 햇살님의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과 핏물  (0) 2010.08.27
아아, 어머니!  (0) 2010.08.26
친구에게 주는 사랑의 말  (0) 2010.08.22
사랑하는 나의 형  (0) 2010.08.21
깜치와의 전쟁  (0) 2010.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