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형
해가 설핏할 무렵이면 동네 아이들은 곧잘 술래잡기를 했다. 술래
는 다른 아이들을 쉽게 찾았다. 하지만 형만은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못 찾겠다 꾀꼬리. 못 찾겠다 꾀꼬리."
그때 "윽······." 하는 형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형이 콘크리트 쓰레기통 속에 숨어 있는데 통장 집 아주머니가 쓰
레기통 뚜껑을 열고 김치찌개 찌꺼기를 쏟아 버렸던 거였다. 김치찌
개 국물을 뒤집어쓴 형은 참비리새끼모양 떠름한 표정으로 엉금엉
금 쓰레기통 밖으로 기어 나왔다. 우거지죽상이 된 형의 얼굴에는
시들시들한 김치쪼가리들이 잔뜩 들러붙어 있었다.
"으악."
벌겋게 김치찌개를 뒤집어쓴 형이 무서웠던지 박꽃처럼 하얀 얼
굴을 가진 미순이가 냅다 비명을 지르며 자기 집으로 달아났다. 형
의 저지레로 술래잡기는 끝났다. 거지꼴을 하고 부아가 나 있는 형
에게 나는 물 한 대야를 날라다 주었다. 수돗물이 안 나오는 우리 집
형편으로 볼 때 물 한 대야는 모든 식구가 손을 씻고도 남을 분량이
었다.
"형, 쓰레기통 속에는 숨지 마. 김치찌개가 뜨거웠으면 어쩔 뻔했
어."
"괜찮아, 술래한테 안 걸리는 게 장땡이야. 여차직하면 똥통에라
도 숨을 거야."
형은 살살이꽃이 피어난 조붓한 골목에 오도카니 앉아 얼굴을 씻
으며 어기찬 말을 했다.
"그래도 조심해. 두부 먹다가 이빨 빠지는 거래. 내 말 허투루 듣
지 마."
"알았어. 물이나 조금 더 떠 와."
나는 쫄랑쫄랑 집으로 가 깨금발을 하고 물독에 있는 물을 떠다
날랐다.
그날 저녁 온 식구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아버지가 떼꾼한
눈으로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근데 이거, 어디서 김치 썩은 냄새가 뻑뻑이 난다!"
"큭큭······."
이불 속에 있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곱지 않
은 눈빛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웃으며 입을 종깃종깃거리
자 끌탕을 하던 형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날 밤, 김치 썩은 냄새가 쉬이 가시질 않아 나는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며칠 후 고물상 앞으로 흑인병사가 한 명 지나가고 있었다. 휑뎅
그렁한 고물상 앞에 서 있던 형이 달빛 같은 미소를 지으며 흑인병
사를 향해 영어로 떠들어댔다.
"헤이! 기부 미 쪼꼬렛!"
그러자 그 흑인벙사가 느닷없는 한국말로 "없소!" 하며 형을 향해
양손으로 엑스자 모양을 해보였다. 흑인병사의 유창한 한국말 솜씨
에 흠칫 놀란 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한국말 잘하는데!"
형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때 짱짱한 흑인병사가 하얀 이를 해죽
거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너뚜 한꾹말 쩡말 짤한다!"
"켁!"
형은 기막히다는 듯 선웃음을 치며 마른기침을 뱉어냈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생게망게한 얼굴로 서 있는 형을 보며 나는
한참 동안 낄낄거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형은 어렸을 때부터 미국사람들에게 관
심이 많았다. 그래서 가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도 안 되는 영어로
고시랑고시랑 떠들어대곤 했다.
누가 알았을까 그러던 형이 자라서 미국사람처럼 영어를 하고, 동
시통역까지도 척척 해내는 영어도사가 될 줄을······.
출처 : 행복한 고물상(이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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