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속치마
운동회가 열리는 아침, 유선이의 할머니는 모처럼 낡은 장
롱에서 깨끗한 한복을 꺼내 입었다. 할머니는 유선이의 머리를
만져주며 말했다.
"친구들은 모두 엄마하고 가는데, 우리 유선이만 할미하고
가게 돼서 어쩌나?"
"괜찮아, 할머니. 어차피 나는 달리기 선수도 아닌데 뭐···."
학교 앞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교문을 들어서고, 그 틈엔 오리 궁둥이
같은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 알록달록한 풍선을 파는 아줌마도
있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가을바람에 펄럭이는 만국기 사이로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가을 햇살에 아
이들이 함성이 더해져 조그만 학교 운동장은 열기로 가득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그늘진 자리로 모여들었다. 그러
나 유선이는 할머니와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와 함께 온 친구들 사이에 할머니와 단둘이 있기가 웬지
창피했던 것이다.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할머니를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든 유선이는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할머니, 덥지?"
"덥기는···.햇볕이 따뜻해서 좋구나. 할미는 감기 기운이 있
어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 춥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더 껴
입고 올걸 그랬구나."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러고는 발갛게 달아오른
유선이의 얼굴 위로 부채질을 해주었다. 유선이는 할머니를 똑
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창피하더라도 그늘진 자리에 앉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할머니, 미안해."
"무슨 소리냐?"
"그냥···."
마음속에 꼭꼭 감춰둔 말이 유선이의 입가에서 뱅뱅 맴돌았
다. 하늘나라에 계신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
었지만 꾹 참았다.
운동회와 시상식이 모두 끝난 뒤,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교문을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학교 앞은 다시 한번 붐볐
다. 유선이는 할머니 손을 잡고 교문을 빠져 나왔다.
할머니와 함께 길을 건너려고 건널목으로 다가갔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
가운데엔 교통사고를 당한 어린아이가 피를 흘리며 나둥그러
져 있었다.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흘금흘금 구경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옷차림으로 보니 집 없는 아이인가 봐."
사람들 틈에서 이런 수군거림도 들려왔다.
유선이의 할머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말없이 아이에게 다
가갔다. 그때 펑퍼짐한 코에 강아지풀같이 푸석한 눈썹을 한
사내가 할머니를 가로막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아인 이미 숨이 끊어졌어요. 신고했으니 경찰들이 곧 올
겁니다. 그냥 놔두세요. 할머니."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아이
에게 다가갔다.
"가엾은 것···.이를 어째···."
할머니가 아이의 몸을 흔들어 보았지만 무거운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차며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얼굴에 묻은 피를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속치마를 벗어 죽은 아이를 정성껏 덮어주었다.
눈처럼 하얀 속치마 위로 할머니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
다. 조금 전 할머니를 만류하던 사내는 객쩍은 표정으로 수굿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유선이는 죽은 아이의 얼굴을 떨쳐버
릴 수가 없었다. 유선이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할머니, 아까 안 무서웠어?"
"무섭긴···.피어나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어린것이 너무 가
여워서···."
"근데 할머니는 왜 속치마를 벗어서 그 애를 덮어준 거야?
창피하지 않았어?"유선이는 또릿또릿한 눈빛으로 내처 물었다.
"창피했지. 하지만 아무리 목숨이 끊어졌어도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단다. 그래서 이 할미가 그리 한 게야."
유선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길가에 열 지어 자라는 해바라
기들도 바람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아, 창피하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
란다."
할머니는 유선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선이는 그
런 할머니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잠시라도 할머니를 창피하
게 생각한 것이 미안하고 마음에 걸렸다. 가만히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따뜻함이 전해져 오자 유선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영혼일지라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입니다.
출처 : 연탄길4(이철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