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아저씨
민석은 해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힘겹게 병원 화장실 문
을 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 아저씨가 큰 걸음으로 다가와 화
장실 문을 힘차게 밀어주었다.
"남자가 이렇게 힘이 약해서 쓰겠니?"
"고맙습니다."
민석은 겸연쩍게 웃으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
시 후 화장실을 나오려는데 마치 주문이라도 외운 듯 화장실 문
이 스르르 열렸다. 화장실 앞에는 조금 전에 만난 아저씨가 미소
를 지으며 서 있었다.
"나는 네가 틀림없이 이 문으로 다시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
었다."
아저씨의 말을 듣는 순간 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
었다.
아저씨 가슴에는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
런데 신기하게도 잠자리가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자리를 올려다보는 민석에게 아저씨가 말했다.
"왜 신기하냐?"
"네··· 아직 살아 있나요?"
"숨은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죽은 건 아니란다. 아직도 속눈썹
같은 다리로 세상을 힘껏 붙들고 있잖니? 이놈은 아저씨 옷을 붙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붙들고 있는 거란다."
"근데 지금은 추워서 잠자리가 없잖아요."
"가을 하늘을 날다가 이놈도 아파서 병원으로 날아 왔을 거
야. 글쎄 아저씨 침대 밑에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가만히 엎
드려 있더라구. 사람이든 동물이든 너무 힘들면 모든 걸 다 내려
놓고 쉬고 싶을 때가 있잖니? 이놈이 그랬었나 봐."
민석은 아저씨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고개를 끄
덕였다.
"이름이 뭐니?"
"민석이요. 김민석."
"이름이 남자답고 멋지구나. 아저씨는 선생님이야. 가평에 있
는 조그만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 아이들 못 본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지만."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아픔을 토해내듯 길게 한숨을 내쉬
었다.
"저도 중학교 올라와서 벌써 몇 달째 학교에 못 갔어요."
"다리가 많이 아프니?"
"양쪽 다리가 모두 마비돼서 저 혼자는 걸을 수가 없어요. 오
랬동안 물리 치료를 받아야 한대요. 그러면 예전처럼 다시 걸을
수 있대요."
"정말 다행이로구나. 아저씨도 이제 다 나았어. 며칠 있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아이들도 다시 가르치고 말야."
"네. 잘되셨네요."
그때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아빠, 어디 갔었어? 내가 얼마나 찾은 줄 알아? 점심밥 왔는
데 다 식는단 말야."
"그래, 그래 알았다. 어서 가서 밥 먹자."
아저씨는 민석에게 자신이 있는 병실을 말해 주고는 딸의 손
을 잡고 서둘러 갔다.
다음 날 온종일 비가 내렸다. 싸늘한 날씨 때문인지 창 밖으
로 보이는 사람들은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다. 민
석은 우울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전날 만났던 아저
씨를 생각했다. 민석은 휠체어를 굴려 아저씨가 있는 병실 앞으
로 다가갔다. 열려진 병실 안으로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 침대
옆 꽃병에는 노란 해바라기가 무거운 얼굴을 들고 방긋 웃고 있
었다. 아저씨는 문 밖에 있는 민석을 보고 서둘러 나왔다. 두 사
람은 병원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빗줄기는 세차게 유리
창을 두들기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리 치료는 끝났니?"
"네. 조금 전에요. 근데, 아저씨는 해바라기를 좋아하시나 봐
요?"
"응, 아저씨는 해바라기를 제일 좋아해. 해바라기는 새들이 아
프게 얼굴을 쪼아대도 언제나 밝은 곳만 보려고 해가 있는 쪽으
로 제 얼굴을 돌리거든. 얼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씨앗을 여물게
하려고 말야···."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빙긋 웃었다. 아저씨의 웃는 얼굴
은 정말로 해바라기를 닮아 있었다.
"근데, 오늘은 네 얼굴이 많이 어두워 보이는구나."
아저씨는 민석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저 때문에 엄마가 많이 힘드세요. 지쳐 누워 있는 엄마를 보
면 늘 마음이 아파요. 사실은 제가 다시 걸을 수 있는 확률도 반
반이래요. 의사 선생님이 엄마한테 말하는 거 들었거든요."
민석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거렸다. 아저씨는 가만히 다
가와 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내 자식이 울기는··· 너는 꼭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다. 소망
을 가진 사람은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거야. 이거 봐라, 아저
씨도 아픈 데 다 나았잖아. 그리고 엄마를 가엾다고만 생각하지
말거라. 엄마는 지금 너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거야. 오래도
록 너와 엄마가 잊을 수 없는 그런 사랑 말야. 너에게 사랑을 가
르치며, 엄마는 마음속에 한낮에도 반짝이는 별빛 하나를 갖게
되는 거란다."
"학교도 다닐 수 없고,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찾아 바쁘게 살아가지만 사실은 자기
에게로 가는 길을 먼저 찾아야 하는 거란다. 우리는 둘 다 아
프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가고 있는 거야.
아픔이 없으면, 사람은 그 길을 잘 보지 못하거든. 칠
흑 같은 어둠에서도 길은 여전히 있는 거란다. 우리가
아파하고 있는 한은··· 민석아, 슬퍼도 자꾸만 밝은 곳을 보
려고 애써야 돼. 해바라기처럼 말야···."
민석은 아저씨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저씨, 아니 선생님은 언제 퇴원하세요?"
"이제 다 나았으니까 일주일이나 열흘 후면 퇴원할 거야."
민석은 그 후로도 매일매일 아저씨를 찾아갔다. 아저씨와 얘
기를 하고 나면 마음속 아픔이 어느새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
저씨는 선생님이라 그런지 언제나 민석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
만져주었다.
열흘이 지나 아저씨가 퇴원하는 날이 왔다. 아저씨는 담당 간
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병실 문을 나섰다. 그 옆에 있던 아저씨
부인과 딸도 여느 때와 달리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저
씨 손을 잡고 있는 딸에게 간호사 한 명이 말했다.
"아빠가 다 나아서 우리 혜진이 너무 좋겠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간호사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민석이도 빨리 나아야 한다. 아저씨처럼 매일매일 치료도 열
심히 받고."
"네, 선생님."
"퇴원하니까 기쁘긴 한데, 이렇게 나 혼자만 나가서 좀 미안
하구나."
"괜찮아요."
"나도 학교로 돌아가서 열심히 아이들 가르칠 테니까, 너도
더 힘내고··· 엄마 앞에서도 더 많이 웃거라. 사람은 웃는 만큼 아
름다워지는 거란다. 알았지? 가끔 연락도 하고."
"네, 연락드릴께요.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와 헤어진 날, 민석은 온종일 우울했다.
민석은 가끔씩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편지도 한
통씩 주고받았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간 아저씨가
민석은 무척이나 부러웠다.
병원 생활은 지루했지만, 민석은 이전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
졌다. 그리고 담당 의사로부터 통원 치료를 해도 좋다는 지시를
받았다.
그 후로 일 년이 지나갔다. 다행히 민석의 마비된 양쪽 다리
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고 학교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민석은 어느 날 문득,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낸 아저씨가
생각났다. 하지만 휴대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아저씨 전화번호까
지 모두 잃어버려 연락할 길이 없었다. 민석은 책상 서랍을 뒤져
일 년 전에 받았던 아저씨의 편지를 찾아냈다.
민석이 살고 있는 마석에서 아저씨가 있는 가평까지는 버스
로 삼사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민석은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가평 시내에 도착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아저씨
의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저씨 이름의 문패가 걸려 있
는 파란색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민석은 잔뜩 설레는 마음으
로 마당에 들어섰다.
"선생님, 선생님···."
방문이 열리더니 일 년 전 병원에서 보았던 아저씨의 딸이 나
왔다. 아이는 깜짝 놀란 눈으로 민석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 기억나니? 나 이제 다리 다 나았어."
숫기 없는 아이는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선생님, 집에 계셔?"
"지금 안 계신데··· 뒷산에 산책 나가셨어요."
"언제 오시는데?"
"잘 모르겠는데···."
아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마루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절 따라오세요. 아빠가 매일 산책 가시는 데를 알거든요."
"그래?"
민석은 환한 얼굴로 아이를 따라나섰다. 들길을 따라 한 십여
분 걸었다. 그리고 푸른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맑은 햇살이 떨어지는 곳에서 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우리 아빠··· 저기 계세요."
아이가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이가 가리킨 곳을 바라
보던 민석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엔 산소 하나만 동그
랗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저기 누워 계세요. 병원에서 돌아오시고 나서 세 달도 못 돼
서 돌아가셨어요."
"그때 병원에서 다 나으셨잖아."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병원에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오신 거래요. 나중에 엄마한
테 들었어요."
"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재밌게 지낸다고 하셨는데···."
"병원에서 돌아오셔서 한 달 동안은 학교에 나가셨어요. 오빠
를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셨어요.
아빠가 먼 곳으로 떠났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아빠는 뒷산 오솔
길로 산책 나간 거니까, 아빠가 보고 싶으면 푸른 소나무 오솔길
을 따라서 걸어오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셨어요."
민석은 아저씨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말없이 산길을 내려왔
다. 아저씨를 생각할 때마다 해바라기처럼 웃던 그 얼굴이 자꾸
만 자꾸만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출처 : 연탄길3(이철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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