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빨간 벙어리장갑

doggya 2011. 1. 3. 06:18

 

 

빨간 벙어리장갑

 

 

 

 "엄마, 나도 장갑 하나 사줘. 응?"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를 졸랐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부지런히 구슬들을 실에 꿰고 있었다. 나는 어떻

게 해서라도 내 목적을 달성해 보려고 울먹울먹하는 목소리로 마구 지

껄였다.

 "히잉. 딴 애들은 토끼털 장갑고 있고, 눈 올 때 신는 장화도 있는

데······.난 장갑이 없어서 눈싸움도 못 한단 말이야. 애들이 나보고

집에 가서 엄마랑 같이 구슬이나 꿰래."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왔다.

 엄마의 재빠르던 손놀림이 갑자기 멈추었다.

 "오섭아, 누가 그랬어? 누가 너더러 구슬이나 꿰랬어?"

 침착하면서도 노여움이 배어 있는 엄마의 목소리에 주눅이 든 나는

그만 생각에도 없는 말을 계속 내뱉었다.

 "누구긴 누구야. 다들 그러지. 애들이 그러는데 엄마가 연탄 배달

을 해서 내 얼굴이 까만 거래."

 나는 미닫이문을 꽝 닫고 나와 눈 쌓인 골목길을 외투도 없이 걸으

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사실 그런 놀림을 받은 적도 없었고, 밤낮

없이 고되게 일하시는 엄마를 슬프게 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오늘 점심시간에 눈싸움을 하다가 장갑이 없어서 손이 시렸을

뿐이었다. 나 말고도 장갑 없이 눈싸움한 아이들은 몇 더 있었다.

 손을 호호 불어 가면서 하면 까짓 별거 아닌데······.그런데 괜히 엄

마를 속상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슬렁거리다

가 날이 저물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 역시 그랬다. 중학교 다니는

형만 겨울 방학에 들떠 혼자 떠들어 댔다.

 나는 낮에 엄마를 속상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좀처

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녁상을 물리고 자꾸만 졸음이

몰려와 아랫목에서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엄마는 그날 밤늦도록 내

머리맡에서 구슬을 꿰시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려고 미적미적 집을 나서는 나를 엄마가 부

르셨다.

 "오섭아, 이거 끼고 가거라."

 엄마는 빨간색 벙어리장갑 한 켤레를 건네주셨다.

 "엄마···."

 장갑의 손등엔 하얀 털실로 작은 눈송이 모양까지 수놓아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장갑을 받아들고 학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학교를 마친 뒤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돌아오는데

저만치서 연탄을 나르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나 반가워 엄마

에게 달려가 빨간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엄마의 목에 매달렸다.

 "이 너셕아, 검댕 묻어. 얼른 집에 가서 아랫목에 있는 밥 꺼내 먹

어라."

 내 얼굴을 만져 주는 엄마의 손이 너무 차서 나는 흠칫 떨었다.

 다시 연탄을 나르려고 손에 끼시던 엄마의 장갑이 내 눈에 들어왔

다. 그 추운 날씨에 차디찬 연탄을 나르시면서 엄마는 낡아빠져 여기

저기 구멍이 난 얇은 고무장갑 하나를 끼고 계셨던 것이다.

 나중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엄마는 연탄 공장에서 성탄절

선물로 고무장갑 안에 끼라고 배급해 준 붉은 털장갑을 풀어서 내 벙

어리장갑을 짜주셨다는 것을.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엄마에게 용서를 구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

만, 손이 커져서 손가락이 장갑 안에서 펴지지 않을 때까지 나는 겨울

마다 그 장갑을 끼고 또 끼었다.

 그리고 결혼할 때 내 처에게 뜨개질을 잘하느냐고 물어보며, 그 이

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또 다시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려 주던

어느 날, 어디서 사 왔는지 뭉실뭉실한 털실 세 뭉치를 바구니에 담으

며 아내가 넌지시 내게 말했다.

 "올 겨울에는 어머님께 따뜻한 털스웨터 한 벌 짜 드리려고요."

 

 

출처 : 행복 쪼꼬렛(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주는 54가지 이야기)

 

 

 

'사랑방 > 햇살님의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머감각에 대하여  (0) 2011.01.05
어린 왕자와 여우  (0) 2011.01.04
아버지의 질문 vs 아들의 질문  (0) 2011.01.02
독수리 봉우리  (0) 2011.01.02
별 담은 바구니  (0) 201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