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마저 그립다
"이제, 일주일을 넘기시기도 힘들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이 나를 불러내더니 말했다. 어쩌면 충분히 예상된 일이
었다. 지금까지 3년이 넘게 버텨왔으니······.
하지만 그 사실을 직접 듣고 나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
고 차마 아내에게 말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러다가 굳게 마음을 먹었다.
"저기 있잖아······."
"응, 왜요?"
당신, 사흘밖에 안 남았대."
아내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격이 너무도 컸던 것
일까. 아니면 그 복잡한 의미를 해석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일까.
이윽고 아내가 울기 시작했다.
"그걸 왜 이제야 알려줘요. 이제 겨우 사흘밖에 안 남았다면서. 마
지막으로 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우리 딸내미한테 해주고 싶은 이
야기도 산더미 같고······."
이번에는 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내의 원망 어린 마지막
질책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내 가슴을 치면
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바보처럼 앉아 있을 뿐이
었다.
아내는 직장암에 걸려 3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 했다. 그러나 수술
에, 약물 치료에, 온갖 방법을 동원해 봤음에도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아내는 휘영청 달 밝은 정월 대보름 날 떠났다. 찰밥이라도 한술 뜨
고 갔으면 좋으련만······ 귀밝이술이라도 한잔하고 갔으면 좋았으련
만······. 아내는 더 살다 가도 늦지 않을, 다시 오지도 못할 길을 그
렇게 서둘러서 먼저 가버렸다.
아내는 액자 속의 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말없는 아내가 야속하
기만 했다.
아내는 곧 너무나 뜨거운 불길 속에 휩싸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
는 듯 눈을 감고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이 내 가슴속에 사무
쳤다.
잠시 후 아내는 마침내 한 줌의 재로 변했고, 네모난 상자 속에 담
긴 채 내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재로 변한 아내를 안고 꺼이꺼이 울
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울다가 아내의 이름을 목청이 터져라 불러보기
도 했다.
"여보."
"네? 왜요?"
아내는 내가 자기를 부를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곤 했다.
그랬던 아내가 이제는 나의 외침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불러도 대답 없는, 재가 되어버린 아내를 어느 산자락 양지바
른 곳에 뿌려주었다.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서 편안하게 살아,
그리고 다시 태어나거든 나처럼 못나고 가난한 사람 만나지 말고, 돈
많고 잘난 사람 만나서 행복해야 해, 꼭! 알았지?"
아내는 내가 집에 있을 때면 온 신경을 나에게 쏟는 것 같았다. 잘
풀리지 않는 사업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나를 볼 때마다 오히려 아내
가 더 안쓰러워했다. 그러니 사업한답시고 아내에게 걱정만 끼치다가
먼저 보낸 나 자신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내가 떠나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를 해주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너
무 슬퍼하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어요."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
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
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다 묻는다." 그러면 먼저 간 아내는 어디에 묻
어야 하는가. 나는 내 기억 속에 묻어두었다가, 언제든 보고 싶을 때
꺼내 보기로 했다.
안방이며 건넌방, 주방, 거실, 집안 구석구석 어느 하나 아내의 손길
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느 하나 아내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모두 남겨놓고 아내는 혼자서 쏙 빠져버
렸다.
아내의 잔소리마저 그립다. 어쩌다 퇴근이 좀 늦기라도 하면 "어디
서 뭘 하고 이제 들어오느냐"고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제는 그 싫은 소리마저 들을 수 없으니······.
작년에 사업이 어려워 부도가 났을 때는 아내의 위로가 큰 힘이 되
었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면 되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다시 일어선들 기뻐해줄 아내가 없다.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에게는 어느 때보다 더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
다. 더구나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따로 있을 텐데, 아빠인 내가
어떻게 엄마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오늘도 나는 퇴근 후 딸아이한테 해 먹일 반찬거리를 사들고 발걸음
을 재촉한다.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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